'경제 패전' 일본의 '온고지신' 바람
  • 일본·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2001.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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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시대 명CEO 다룬〈결단력〉, 화제 집중…
혼다·마쓰시타 등 위기 돌파 사례 조명


일본의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하늘까지 꿰뚫을 것 같던 거품 경제가 파탄하자 세계 제2의 경제 대국도 굉음을 울리며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제2의 패전'을 맞이한 일본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야마이치 증권과 장기신용은행을 비롯한 일류 기업들이 똑같은 굉음을 울리며 우수수 침몰했다.


이전의 일본 경영자들은 그런 위기를 과감한 결단력으로 극복해 왔다.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혼다 자동차의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 마쓰시타 전기의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무에서 유 창조한 소니와 혼다


경제적 패전을 맞이한 일본에서 요즘 쇼와(昭和) 시대 걸출한 경영자들의 결단력에 초점을 맞춘 〈결단력〉이라는 책이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는 모리타를 비롯한 쇼와 시대 경영자 7명이 등장한다.


모리타는 소니의 전신인 도쿄통신공업 전무 시절인 서른두 살 때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태평양전쟁 때 해군 기술장교를 지낸 그는 무엇이든 크고 넓고 다양한 나라 미국을 돌아보면서 왜 이런 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는지 모르겠다는 큰 회한에 휩싸였다. 그는 또 일본의 조잡한 제품을 이런 나라에 파는 것은 큰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벨 연구소의 모기업인 웨스팅하우스 사와 약 9백만 엔에 트랜지스터 기술을 도입하는 특허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모리타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럽에 들러 네덜란드의 아인트호엔이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여기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필립스 사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미국 여행 때 위축된 마음을 일신할 수 있었다. 조그만 농업 국가에서 생겨난 필립스 사가 하는 일을 우리도 못할 리 없다는 자신감이 우러난 것이다.


그러나 모리타가 귀국해 웨스팅하우스 사와 특허 계약을 체결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통산성을 찾아가자 '귀중한 외화를 반출하는 계약을 멋대로 체결했다'고 큰 질책을 받았다고 한다. 만약 이때 모리타의 결단이 없었다면 일본의 전자산업이 세계를 제패하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지 모른다.


혼다 소이치로도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으로 오토바이 생산업체에 불과했던 혼다기겐고교(本田技硏工業)를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일구었다. 일본의 자동차회사로서는 제일 늦게 자동차 제조에 뛰어든 혼다 자동차는 기술력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 1954년 영국의 유명한 만도 TT레이스에 출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제 플러그·타이어·체인은 경주차에 장착할 수 없을 만큼 조잡했다.


그래서 혼다는 유럽제 부품을 사들고 귀국하다가 로마 공항에서 중량 초과에 걸렸다. 그는 중량이 초과한 부품을 양복 상하의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간신히 일본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는 또 독일의 폴크스바겐 자동차 공장을 시찰하면서, 그때까지 일본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십자 모양 프로스 나사못을 주워다 조립 공정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다.


혼다의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59년 만도 레이스에 첫 출전한 혼다 자동차가 2년 후에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혼다 자동차는 그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경주 대회인 F1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F1 경주차의 엔진을 설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엔진 도면도 그릴 줄 모르는 입사 3년짜리 스물일곱 살 먹은 사원이었다.




"대학을 나왔다는 것을 빨리 잊어라. 그래야만 창조력이 우러나온다. 책 속의 지식에만 의존하면 독창성은 발휘할 수 없다"라는 것이 혼다의 평소 입버릇이었다. 그래서 혼다는 엔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햇병아리 사원에게 엔진 설계를 맡긴 것이다. 그 결과 혼다 자동차는 독특한 RA271 엔진으로 F1에 출전해 2년 만에 우승을 따냈다.


소니와 혼다 자동차가 대표적인 전후파 기업이라면 마쓰시타 전기와 샤프는 전쟁 이전부터 존속했던 명문 기업이다. 그러나 두 명문 기업도 전후 불황을 맞아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던 마쓰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66세 때인 1961년 회장으로 추대되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회사에는 한 주에 한 번꼴로 출근하면서 회사 일보다는 PHP연구소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1964년 불황에 직면해 본사는 물론 판매회사와 대리점이 모두 적자를 내자 그는 '35전의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마쓰시타 전기는 1930년대에는 전구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이때 가장 비싼 도시바 전기의 전구가 35전이었다. 마쓰시타는 도시바의 전구 값과 똑같은 35전으로 출하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그러자 판매점·대리점 들이 일제히 만류했다. 일류 기업과 똑같은 가격으로 출하했다가는 단 한 개도 팔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러나 마쓰시타는 그들을 설득해 35전 판매를 관철했다.


공격적 경영으로 난관 뚫은 마쓰시타와 샤프




마쓰시타는 1964년 8월 다시 영업본부장 대행으로 복귀하여 판매제도를 대폭 수술했다. 지역 판매제도를 확립하고 사업부 직접 판매제도와 새로운 월부제도를 도입해 1년 반 만에 본사는 물론 판매점·대리점 들도 모두 흑자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회사가 위기에 직면하자 회장 자리를 박차고 영업본부장 대행으로 복귀한 마쓰시타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거함 마쓰시타 전기는 그때 침몰했을지도 모른다.


전쟁 전부터 연필 심지가 튀어나오는 '샤프 펜슬'과 광석 라디오 '샤프 다인'으로 유명했던 하야카와 전기공업(샤프의 전신)도 패전 직후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창업자 하야카와 도쿠지(早川德次)는 경영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중앙연구소를 설립하여 세계 최초의 전자 계산기와 액정 기술을 실용화하여 회사를 재건했다.


캐논을 세계적인 카메라 및 사무용 기기 메이커로 성장시킨 미다라이 다케시(御手洗毅)는 본래 산부인과 의사였다. 우연한 인연으로 사장을 맡은 후 그는 '타도 라이카'를 외치며 전력 질주해 오늘의 캐논을 일구었다.


기업은 흔히 30주년 주기로 부침을 거듭한다고 한다. 훌륭한 경영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본체까지 흔들리고 있는 것은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그들의 왕년의 결단력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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