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직한 이슬람 제자들의 '참상'
  • 아프가니스탄·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2001.06.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프가니스탄 현장 취재/
전쟁·기아에 극단적 원리주의 통치로 '최악의 삶'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 국제 사회가 봉쇄함에 따라 수도 카불로 향하는 항공편은 국제기구 직원을 태우는 전세기가 이따금 있을 뿐, 이 나라는 외부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이라크보다 더 혹독하게 따돌림 받고 있는 것이다.


파키스탄 남서부 발루치스탄 주의 국경 도시 케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가는 몇 안되는 길목에 있다. 멋 없는 군사 도시 케타에서 버스로 국경 마을 샤만에 이르는 100km 코작 파스는, 해발 1,700m인 험준한 산맥을 뚫고 이어지는 절경의 연속이다. 샤만에서 고물 합승 지프를 타고 아프가니스탄 검문소를 지나 첫 국경 마을 스핀볼닥을 거쳐 칸다하르 시에 이르는 160km 먼지 길은 5시간 내내 차속에서 엉덩방아를 찧어야 하는 메마른 길이다.




이 나라의 남부 최대 도시인 칸다하르는 해발 1,100m인 메마른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아침부터 불어오는 흙먼지 때문인지 도시 전체가 황량하고 어수선하다. 근세 아프가니스탄의 첫 수도였고 예로부터 인도 대륙에서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번창한 상업 도시였으나 이제 그 영화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칸다하르 도심에서는 크게 웃는 사람도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도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조용한 편도 아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집권 탈레빈 군인들이 길거리에서 크게 웃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정신에 위배된다고.


탈레빈은 자신들을 탈렙(학생·제자)이라고 부른다. '이슬람의 충직한 제자'가 되겠다는 뜻이다(탈레반은 탈렙의 복수형인 탈레빈을 잘못 발음한 것이다). 탈레빈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한 옛 소련군을 10년 전쟁 끝에 물리치고 집권한 무자히딘 게릴라들을 상대로 7년 동안 싸운 끝에 카불 입성에 성공했다.


웃음·음악·TV 시청 금지, 턱수염 적어도 처벌


탈레빈 병력은 5만∼6만 명에 불과하나 '이슬람의 충직한 제자'들이 선포한 금기 사항은 많다. △공공 장소에서 크게 웃지 말라(경건한 모슬렘의 태도가 아니다) △음악을 듣지 말라(상점·호텔·결혼식·파티에서도 금지. 이슬람 음악은 예외) △춤·팝송·비디오·텔레비전을 보지도 듣지도 말라(정부 라디오 방송은 예외) △연 날리기를 하지 말라(교육에 방해) △비둘기 등을 사육하지 말라(시간 낭비) △사진 찍지 말고, 초상화도 그리지 말라(관공서 제출용 증명 사진 예외) △도박하지 말라(위반자는 1년 이상 징역) △남녀 공중 목욕탕은 폐쇄하라(알몸 보이는 것은 경박한 짓이다) △도둑질하지 말라(위반자는 손목 절단) △성인 남자는 턱수염을 짧게 기르거나 손질하지 말라(턱수염은 이슬람교를 경외한다는 표시다. 위반자는 턱수염이 자랄 때까지 징역형. 턱수염 길이의 척도는 '종교 경찰'이 오른손으로 턱수염을 쥐었을 때 '한 주먹 가득'해야 함) △'티타닉' 헤어스타일 금지(영화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처럼 머리를 치켜 깎는 자와 이발사는 모두 곤장 몇 대와 징역형).


여성에 대한 금기 사항은 더 복잡하다. △여자는 집 밖에서 일하지 말라(병원 관련 직업은 예외. 그러나 남자와 같은 사무실 근무 금지) △여자는 자동차를 운전하지 말라 △가족 이외의 여자를 차에 태우지 말라 △학교에 보내지 말라(여학생 전용 학교 세울 때까지) △사교육도 하지 말라 △간통한 여자는 즉시 사형.


'도덕심 함양과 악덕 행위 방지부'라는 정부 부처는 공포의 대상이다. 이 부처에 속한 종교 경찰관들은 반이슬람 행위자를 적발한다. 지난 4월 카불 북쪽 바미안 지방에 있는 세계 최대 석불상(53m·5세기에 세움)의 얼굴 부분을 폭파한 탈레빈은 최근 소수 민족인 힌두교도들에게 외출할 때 이름표를 달도록 명령해 분노를 사고 있다.




한반도의 3배쯤 되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은 3년째 계속되는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다. 땅과 집을 버리고 떠나는 지방 주민들의 대탈출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100만명이 주변 국가로 떠났고, 일부는 큰 도시로 몰려들었다. 25만이던 칸다하르의 인구는 2년 사이 40만으로 불어났다. 대낮에는 덥고 밤에는 차디찬 모랫빛 도시 곳곳에 노숙 가족이 즐비하다.


칸다하르 남쪽 110km 지점 스핀볼닥 난민촌. 스칸디나비아 구호 단체가 난민 2만명을 위해 세웠으나 현재 10만명을 수용하고 있다. 한 노르웨이 직원은 이 나라의 폭발적 난민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전 중에는 도시 주민이 시골로 피난하거나 이웃 나라로 갔다. 그러나 지금은 시골 사람들이 땅과 집을 버리고 떠나고 있다. 이 나라의 경제와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마비시키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22년 간의 전쟁과 내전으로 이미 2백만명이 사망하고 6백만명이 이웃 나라로 피난했다. 2천5백만 인구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이다. 엑소더스는 계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대 양귀비 재배국이다. 지난해 생산량은 3천5백t. 세계 총생산량의 75%다. 양귀비 재배는 이 나라 제1의 산업이며 외화 수입원이다. 탈레빈은 전쟁 비용을 양귀비를 수출해 충당해 왔다. 불과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지난해 8월 어느날 아침 탈레빈 최고 지도자 물라 무하메드 오마르는 갑자기 양귀비 재배 전면 금지령을 내렸다. '마약이 이슬람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단 한 줄의 성명으로 국가 제1의 산업은 양귀비 꽃잎처럼 스러졌다. 국민의 불만은 팽배하고 있다. "하필이면 가뭄으로 살길이 막막한 이 때에 금지시키는가? 1년에 2모작이 가능한 양귀비는 가뭄에 강하고 재배는 노동집약적이어서 사람을 많이 고용해 왔다. 양귀비 줄기는 연료로 사용하고 가축 사료로도 이용한다"라고 칸다하르의 최대 양귀비 재배업자 하산은 주장한다.


양귀비 재배 금하고도 '왕따' 당해


오마르의 양귀비 재배 금지령은 철저히 이행되었다. 한달 전 유엔마약단속계획(UNDCP) 조사단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양귀비 재배지가 조사 지역 내에서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조사단은 세계 최대 양귀비 재배국이 1년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마약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세계 마약퇴치운동 사상 가장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격찬했다.


마약에 가장 골머리를 앓는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은 남미와 동남아에서 마약과의 전쟁을 위해 엄청난 돈과 인력을 쏟아 왔다. 보상을 조건으로 양귀비 재배 포기를 유도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미국과 국제 사회로부터 보상은커녕 그 성과마저 공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반발한 일부 탈레빈 지도부는 가뭄을 극복할 때까지 소규모 양귀비 재배를 허가하자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랜 전쟁, 사상 최악의 가뭄과 기아, 막혀버린 양귀비 수출 길.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고난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는 것이 난민구호 외국 요원들의 판단이다. 국민의 반발은 여기저기 눈에 띈다. 택시 운전기사는 금지된 음악을 몰래 틀었고 한 사진관 주인은 필름을 팔고 있었다.


이 나라 여성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쓰는 옷 부르가스를 입고서도 혼자 거리에 나서면 안된다. 그러나 대도시에서는 혼자 다니는 여성도 간혹 볼 수 있으며, 시장 뒷골목에서는 이란에서 밀수입한 하이힐 구두까지 팔고 있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탈레빈 정권에 저항"


탈레빈 내부의 균열 조짐도 보인다. 왼쪽 눈을 실명한 최고 지도자 오마르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극히 꺼린다. 이슬람 창시자 모하메드의 영상이 알려진 적 없는 것처럼, 오마르의 초상화도 볼 수 없다.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극단적으로 적용해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한 그의 강경 노선에 온건파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고 한 영국 기자는 주장한다. 얼마 전 오마르의 권위가 도전받는 사건이 지난주에 있었다. 세계식량기구(WFP)는 카불 시민 30만명분의 빵을 굽는 구호 사업을 해왔다. 그러나 식권 배급 명단에 부정이 있음을 눈치채자 세계식량기구 직원이 입회해 새로 가구 조사를 하게 해 달라고 오마르에게 요구했다. 오마르는 가정집에 외국인 남녀가 출입하는 것은 이슬람 윤리에 배치된다고 반대했다가 온건파의 강한 반발에 직면해, 세계식량기구에 재협상을 제의할 수밖에 없었다.


"탈레빈 지도부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고 방식이 변해서가 아니라, 남자는 물론 여자도 서서히 저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라고 한 중년 상인은 말한다.


용감하고 강인한 아프가니스탄 국민은 자부심 강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조국을 침공한 세계 최강 소련군을 험준한 산악으로 끌어들여 10여 년간 처절하고 끈질긴 사투 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지금 외침이 아니라 내전으로 자기 파멸을 계속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얼굴에는 수심이 짙게 드리워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