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밟힌 내 조국, 피의 역사를 말한다”
  • 마틴 바라키(독일 마부르크 대학 정치학 박사) (rena@e-sisa.co.kr)
  • 승인 200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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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출신 독일 정치학자 기고/100년 전부터 영·미·독·소 ‘각축장’
마틴 바라키 박사(45)는 독일에서 활동하는 아프가니스탄 전문가다. 1947년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출생한 그는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뮌스터 등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그가 미국을 포함한 서방 국가들이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의 조국’을 어떻게 경략(經略)해 왔는지 <시사저널>에 기고해 왔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때 아프가니스탄을 ‘국제 사회의 미아’라고 불렀다. 그는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처참한 내전과 기근에 시달리는 나라를 세계가 외면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이 20세기 후반 들어 세계의 눈길을 모을 계기가 몇 차례 있었다.



그 첫 계기는, 1979년 소련군의 카불 입성이다. 서방 언론은 그 후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10년간 벌어진 무자헤딘의 반소 게릴라 전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서방은 1992년 무자헤딘이 권력을 잡은 후부터 민중이 겪은 참극에는 눈을 감았다. 그 무관심은 1994년 무자헤딘의 학정과 내전을 끝낸다는 구실로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이른바 ‘이슬람 국가’를 세웠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은 어느 날 갑자기 국제 사회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반 테러 전쟁’의 여파로 다국적 군대가 주둔하는 상황에서 복잡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아프가니스탄은 줄곧 세계 열강의 패권을 가름하는 전략 요충지였다. 그 역사는 1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영국은 19세기에 두 번이나 침략 전쟁을 벌여 그 때마다 3년간 점령했다.


영국 못지 않게 아프가니스탄에 눈독을 들인 나라가 독일이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영국·인도에 대항하는 동맹국을 만들려고 아프가니스탄에 접근했다. 아프가니스탄은 독일이 이 전쟁에서 이긴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데다 영국의 경제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동맹국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아프가니스탄 포섭 전략을 밀고 나가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아프가니스탄의 근대화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히틀러는 아프가니스탄에 투자하는 독일 기업에 무이자로 신용·재정 보증을 약속했다. 소련을 침공할 때 아프가니스탄을 교두보로 삼는다는 구상이었다.

패전국 독일(서독)은 195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 투자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전쟁 전에 시작한 수력 발전소 공사를 비롯해 송전선·전화선 부설 공사 등 대형 프로젝트는 대부분 독일 기업이 맡게 되었다. 독일이 아프가니스탄 투자에 이렇게 적극 나선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투자 가치만 고려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중앙아시아 전략이라는 장기적인 계산이 담겨 있다. 그러나 서독을 비롯한 서방의 아프가니스탄 외교는 1978년 4월 정변 이후 냉각기에 들어가고, 1979년 12월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얼어붙었다.
여기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변과 소련군이 개입한 배경을 살펴보자. 197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체 인구에서 5%를 차지하는 지주들이 50%의 토지를 갖고 있었다. 북부 지역은 2% 지주가 70% 토지를 차지했다. 97%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고, 지주들은 노예를 부리기도 했다. 대지주 저택에는 으레 사설 감옥이 딸려 있었다. 1964년 지하에서 창당된 민주민중당 당원이었던 장교들은 바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73년 정변을 일으키고 왕족 다우드를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다우드는 개혁 정치를 가로막고 민주민중당 지도부를 체포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78년 군부는 두 번째 정변을 일으켜 다우드를 몰아내고 당 지도부에 권력을 맡겼다. 토지 개혁과 문맹 퇴치가 이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개혁 정치는 대지주들의 저항과 급진주의 탓에 실패하고 급기야 정치 위기에 빠져 소련군 개입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과도 정부의 무자헤딘 파벌은 범죄 집단”


미국이 공식으로 무자헤딘을 처음 지원한 것은 1980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은 1979년 7월3일 무자헤딘을 지원한다는 비밀 계획을 카터 대통령이 승인했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1992년 4월 친소 정부가 권력을 포기했을 때 무자헤딘은 유엔에서 합의된 과도 정부 구성안을 거부하고 카불에서만 수천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자헤딘이 파벌 싸움에 날을 지새우고 있던 1994년 초, 미국 의회 외교위원회는 파벌 대표들을 ‘초대’했다. 워싱턴에 모인 파벌 대표들은 이 때 처음으로 중앙아시아의 석유·가스를 수송하는 파이프 라인을 아프가니스탄에 부설하려는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프로젝트가 지연되지 않도록 내전을 끝낸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해 9월 파키스탄에서 넘어온 무장 세력이 칸다하르를 습격했다. 탈레반. 바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무자헤딘을 대체하는 세력으로 준비해 둔 카드였다.


미국 국무부는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자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승인하겠다고 밝혔고, 1997년에는 미국 기업 우노칼이 주도하는 파이프 라인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그런데 같은 해 독일 시사 주간지 <슈피겔> (5월26일자)에 따르면, 파키스탄 총리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기업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 탈레반에게 ‘여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지역을 점령하라’는 마지막 시한을 통고했다고 한다. 그 후 1998년에 우노칼은 아프가니스탄에 미국과 유엔이 승인하는 안정된 정권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파이프 라인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내전이 끝날 가능성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무자헤딘이 그랬듯이 탈레반의 존재 이유도 의심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반 테러 전쟁’을 통해서 탈레반이 제거된 후 선보인 과도 정부의 면면을 보면 태반이 과거 무자헤딘 파벌의 대표들이다. 독일 공영 방송 WDR는 이들이 ‘범죄 집단’이므로 국제 사회가 인권을 중시한다면 모두 체포해 재판에 회부해야 마땅하다고 평했다. 역사상 한번도 외세의 군사 지배를 용납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무자헤딘 파벌들이 다국적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번역·정리/프랑크푸르트·허 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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