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덕에 NGO도 ‘매파 세상’
  • 특별취재팀 ()
  • 승인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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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지원 활동에 강경파 ‘주도권’…미국 보수파와 “북한 붕괴” 한목소리
9·11 테러 사건과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이어지면서 대북 지원을 위한 국제 비정부기구(NGO) 활동에도 힘의 역전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 화해 분위기를 등에 업고 한때 급물살을 탔던 온건한 대북 지원 활동이 빠르게 퇴조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강경파의 목소리가 빠르게 주도권을 장악해 가고 있다. 여기에는 미국의 입김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식량 지원·탈북자 돕기·북한 인권 문제 등 대북 지원 현안을 둘러싼 국제적 연대 전선에서는 대립과 갈등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특히 지난 3월14일 대북 강경파가 주도한 탈북자 25명 베이징 스페인대사관 진입 사건, 이른바 ‘기획 망명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부 강경파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북한 체제 붕괴론’까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월 9∼10일 이틀간 일본 도쿄에서 <조선일보>가 후원해 열린 강경파 중심의 북한 인권 관련 국제 회의에는 8개국 16개 단체 대표 40여 명이 참석해 유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 회의는 국내의 대표적인 대북 강경파 비정부기구인 북한인권시민연대(대표 윤 현)가 주최했다. 일본의 반북 단체로서 중국 내 탈북자들을 조직적으로 지원해온 긴급구출 네트워크(이영화 사무국장),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북 활동가 피에르 리굴로 씨,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 칼 거시먼 회장, 미국 방위포럼재단 수전 솔티 회장 등 내로라 하는 대북 강경파들이 이 회의에 총집합했다.



이 자리에서 시종 일관 강조된 것은 북한의 ‘유례 없는 인권 유린 사태’였다. 이들은 북한 정권을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가장 극심한 형태의 인권 유린 책임자’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또 대북 식량 지원 사업에 대해서도 ‘원조 식량이 북한 인민의 예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인권의 빛을 비추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계속해 가겠다’는 다짐으로 이 회의가 끝난 지 바로 한달 뒤 가칭 ‘국제 인권 자원봉사자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기획 망명 사건이 터졌다.



기획 탈북의 실행 주체인 국제인권자원봉사자 모임에서 현재까지 신원이 드러난 인물은, 사건 발생 직후 현장에서 기자회견을 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씨와, 비슷한 무렵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네가 참여한 사실을 인정한 나카히라 겐이치 씨(북조선난민구호기금) 등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후속 작업’을 위해서라면서 다른 가담자의 신원 공개를 꺼리고, 아예 가담 사실 자체도 부인하고 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측은 이미 세계 22개국 2백70여 곳에 네트워크를 가지고, 1996년 창립 이래 어느 단체보다 대북 강경파들의 국제 연대에 힘을 기울이고도 ‘이번 사건과 우리 단체와는 무관하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들 인사 또는 단체들의 이음매를 추적해 보면 배후 세력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국경 없는 인권회’다. 노르베르트 풀러첸 씨가 북한에서 추방된 후 한국 언론과 가진 기자 회견에서 자신이 소속되어 있다고 밝힌 국경없는인권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반북한 국제 연대의 유럽쪽 ‘사랑방’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반북 강경파인 피에르 리굴로 씨는 이곳의 단골 손님이다. 그는 ‘북한 프로젝트’ 코너에 ‘나치 독일, 옛 소련, 그리고 북한의 수용소 실태 비교 분석’이라는 글을 올려놓기도 했다. 내용은 강철환·안 혁 등 지난 1990년대 후반 북한을 탈출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요덕수용소 생활을 상세하게 고발하며 북한을 비난한 것이다.



그는 2000년 국내의 대북 강경파 잡지인 〈시대 정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김정일 체제가 존속되는 한 북한의 인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북한 체제 완전 붕괴를 주장했던 인물이다. 이같은 내용의 인터뷰가 실린 〈시대 정신〉은 1980년대 한때 이른바 ‘강철 서신’의 저자로 알려졌다가 1990년대 후반 대표적인 대북 비판론자로 전향한 김영환씨가 주도해온 잡지이다.



국경없는인권회, 국제적으로 폭넓게 교류



국경없는인권회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 단체의 발족 시점이다. 국경없는인권회는 동유럽권 붕괴가 한창이던 1989년 정식 등록해 1990년대 중반 내내 알바니아·불가리아·루마니아에서 민주주의와 종교의 자유,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해 왔다고 밝혔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단체가 이미 1998년 미국 지부를 설치해 미국쪽 인사와 교류 폭을 넓혀왔다는 사실이다. ‘대북 강경파 국제 연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단체는 유럽의 구심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을 잇는 가교 구실을 했을 공산이 크다.



이 단체와 관계된 미국측 인사로는 현재 미국 스탠퍼드 대학 후버 연구소에 재직하는 래리 다이아몬드 교수가 있다. 그는 지난 2월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북한 인권 국제회의 때 행사 비용을 부담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이 발행하는 계간지 〈저널 오브 데모크라시〉의 공동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의 대외 정책 문제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한 비정부간 활동 등 다양한 분야를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가 미국 사회의 핵심 이슈로 떠오르기 훨씬 전인 1998년 ‘굴락(북한의 강제 수용소를 가리킴. 옛 소련의 수용소 이름에서 유래)의 내부’라는 제목으로 북한을 호되게 공격하는 논문을 후버연구소 기관지에 발표한 바 있다.



‘북한은 세계 최악의 마지막 스탈린 독재 국가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정치범 및 노동자 수용소의 고향이기도 하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그의 논문 또한 국경없는인권회의 인터넷 코너 한구석에 올라 있다. 이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는, 논문의 주제가 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열악한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직접 서울에 와서 탈북자들과 몇 시간 면담하고 돌아갔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미국의 일부 보수파 인사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북한 붕괴론’ 논리와, ‘기획 망명 사건’ 직후 터져 나온 사건 가담자들의 ‘북한 붕괴론’ 논리가, 원래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빼어 닮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연방 상원 외교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이자 미국 보수 주류의 일원인 짐 도란 씨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보수 주간지인 〈위클리 스탠더드〉 최근호에 ‘미국은 과거 동독에서 대거 탈출한 난민들이 동독 정권 붕괴에 크게 기여한 전례를 따라, 북한 인민 대거 탈북을 권장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기고했다. 우연하게도 그의 글이 발표된 무렵, 노르베르트 폴러첸 씨 등 일부 활동가들도 일제히 ‘북한 붕괴’를 주장했다.



강경파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 북한을 공격할 때 단골로 써먹는 ‘대북 지원 식량 전용론’도 미국 보수파 논법의 복사판이다. 예컨대 짐 도란 씨는 “미국과 남한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대북 지원은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합법화해줄 뿐 아니라, 북한군 전력 유지에 도움을 주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노르베르트 폴러첸 씨는 지난 3월18일 일본 도쿄에서 가진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북한의 자연 재해에 의한) 기아 문제는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의 기아 문제는 김정일 정권의 식량 전용과 농업 체제 실패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인권·탈북자 문제 등 북한의 민감한 현안에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보여온 온건파 비정부기구들은 일부 강경파 비정부기구의 움직임에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또한 강경파의 주장에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온건파 “강경파 돌출 행동 걱정된다”






탈북자에 대한 ‘난민 지위’ 문제의 경우, 온건파는 ‘식량난 때문에 국경을 넘는 북한 주민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탈북자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 온건파는 강경파의 ‘지원 식량 전용’ 주장에 대해서도 ‘북한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부적절한 판단’이라고 주장한다. 식량의 절대량이 모자라는 상황, 그리고 여느 국가보다 군인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이용선 총장은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걱정한다. 강경파의 돌출 행동이 상황을 더 꼬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탈북 문제가 커지면 커질수록 국경 통제는 강화될 것이며, 이는 곧 북한 주민의 상황을 더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라고 온건파인 이총장은 판단한다.



이같은 온건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 지원을 둘러싼 강경 기조는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하원은 오는 4월 ‘북한 인권과 식량 지원 문제’를 의제로 대대적인 청문회를 열 예정이다. ‘기획 탈북·망명’의 주모자들은 이미 제2·제3의 ‘기획 탈북· 망명’을 실행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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