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망명, ‘북한 붕괴 시 나리오’ 첫 장인가
  • 특별취재팀 ()
  • 승인 200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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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기획 그룹 ‘완벽한 기술’·‘막대한 자금력’ 의혹 불거져 …미국 CIA ‘공작’ 가능성 제기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가 뜨고 있다. 남북한간 그리고 북·미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미국 보수층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를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상식을 깨는 솔직하고 파격적인 주장이 많이 등장한다.





탈북자 25명의 스페인대사관 집단 망명 사건에 대한 3월19일자 보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워낙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어서 누가 주도했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다들 궁금해 할 때였다. 기사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아주 유익했다. 먼저 누가 주도했나. 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매우 치밀하게 계획된 비밀 작전이다. 신원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 일본 미국 유럽인 약 30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주도했다’고.



왜 했나? 이 대목에서 기사는 아주 ‘참신’하다. 누구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일깨운다. 바로 이들 배후 세력이 1989년 동독인들의 체코·헝가리 대사관 집단 망명 사태를 모델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 대사관 망명 사태야말로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독 정권 붕괴를 이끌어낸 전초전이었다. ‘역사가 반복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Hoping history can repeat)’라는 기사 제목 또한 시사적이다.



그런데 이 흥미진진한 기사에 한 가지 맹점이 있다. 이 기사의 주요 취재원으로 등장하는 독일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씨가 정작 자기 나라 언론으로부터는 외면당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독일의 <프랑크프루트 룬트샤우>지는 지난 3월16일자 베이징발 보도에서 그를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인물’ ‘순진한 망상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기꾼’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70쪽 기사 참조).



그렇다고 기사가 잘못되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제가 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폴러첸 씨의 발언이 망상가의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 ‘동독을 모델로 한 북한 붕괴 시나리오’와 똑같은 내용을 담은 기고문이 3월25일자 미국 보수 주간지 <위클리 스탠더드>에 실려 있는 것이다. 필자는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인 짐 도란 씨. 그는 올해 초 미국 의회 특명으로 서울을 방문해 황장엽씨 방미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는데,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대북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위클리 스탠더드>라는 잡지 자체가 공화당 의원들의 정책 참고용 필독서라고 하니 상당히 비중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난민의 탈북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큰 제목은 ‘악의 축과 아시아의 분열.’ 부제목은 ‘북한 해방이 궁극적 목표가 돼야 한다.’ 그러니 짐 도란 씨가 이 글에서 한국의 포용정책을 반대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대북 사찰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에 대해서도 그는 비판적이다. 북한이 이런 주장을 덥석 받아들이면 ‘낭패’라는 얘기다.



그는 제3의 길을 주장한다.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한 이가 부시 대통령이고, `‘악의 축’ 발언은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김정일 정권을 제거해 북한 인민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제시한 방법들을 보면 개중에는 지금 진행되는 일도 있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들어 있다. 즉 △북한의 군사 위협과 인권 탄압을 국제 사회에 적극 공개하고 △김정일 정권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북한 난민의 대량 탈북을 지원하고 △북한 내부에 반정부 세력을 조장하고 △대북 군사 억지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독을 모델로 한 북한 붕괴론’에서도 그는 몇 걸음 더 나아갔다. “과거 동독에서 대거 탈출한 동독 난민들이 1989년 동독 정권의 붕괴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은 북한 난민들의 대거 탈북을 권장해야 한다. 아울러 미국은 남한에 있는 탈북자 지원 단체들과 국제 비정부기구(NGO)들과 정부에 대해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표현이 미래지향적이어서 여태까지는 안했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스페인대사관 집단 망명 사건은 그것이 미래의 일만은 아니라는 의심을 갖게 한다.



우선 이 사건을 배후에서 기획하고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국제 인권 자원봉사자 모임’(IHRV)부터 들여다보자.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 인권 자원봉사자 모임은 미국 일본 프랑스 벨기에 독일 인권운동가들의 자발적 봉사 모임이다. 조직의 체계나 사무실도 갖추지 않은 임의 단체이며, 따라서 이번 거사 비용도 자비 부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수 자원봉사자 모임이 진행한 거사라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많다는 것이 정보 분석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거사 목적이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매우 정치적이고 치밀하다. 이번 일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인사는 “원래 계획은 3월18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인권위원회 회의 때까지 스페인대사관 안에서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즉 유엔인권위 회의에 탈북자 난민 지위 인정 문제를 상정해 중국 정부를 구석에 몰려고 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중국측이 속전속결로 처리해 애초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국제 사회의 동향까지 시야에 넣고 움직였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또 한가지 제기되는 의문점은, 과연 스페인대사관 난입이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점이다. 중국 현지 사정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대사관 지역은 중국 공안의 경계가 삼엄한 위수 지역이다. 그런 곳에 CNN 등 서방 언론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설치한 채 대기하고, 25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유유히 다가가는 장면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 문제와 관련한 민감한 주장도 있다. 중국 공안의 일부 세력이 협조하지 않았다면 쉽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탈북자나 지원 단체의 동향을 중국 정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확인된다. 대사관을 점거하기 전에 이미 중국 공안 당국과 외사담당 감찰 조직 및 안전부 등 세 군데에서 탈북자들과 국내외 지원단체들의 동향 보고서가 상부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소식통도 시인했다. 다만 그는 “상부에서 알고 있었으나 전인대 등 국내 정치 사정 때문에 신경을 못썼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국내 정보 전문가들은 이를 달리 해석한다. 최소한 실무 단위의 일부 공안 세력이 협조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라는 지적이다. 돈 문제도 근거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과연 이번 사건의 첫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비용이 어느 정도 들었을까. 이번 일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비용을 자비로 조달했다고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번 거사에는 자그만치 1백20만 달러나 들었다는 얘기가 베이징 외교가에서 은밀하게 나돌고 있다. 1백20만 달러는 턱없이 많은 비용이다. 한 정보 전문가는 “처음에는 12만 달러라고 하는 줄 알았다. 재차 확인을 요청하니 1백20만 달러가 틀림없다고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일로 한몫 잡은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베이징 외교가에 나돌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즉 일부 공안 세력에 대한 협조 대가로 비용을 지불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많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이토록 막대한 비용을 마련하고 뛰어난 교섭 수완을 발휘해야 하는 일을 일개 자원봉사자 모임이 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렇다면 진짜 배후는 누구인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정보 전문가들이 ‘새삼’ 주목하기 시작한 조직이 바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 시절 대북 공작은 주로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이 담당했다. 북한 관련 이슈의 상당 부분이 군사와 관련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정보국은 공작보다는 정보 수집에 치중했다. 1995∼1998년 식량난으로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쇄도할 때도 정보 수집 이외의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을 전후해 중앙정보국이 북한 붕괴 유도 쪽으로 공작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주장이 주로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뭔가 터질 것 같다는 정도였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공작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얘기다.
왜 중앙정보국이 붕괴 공작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가. 우선 1999년 이후 북한이 통제력을 회복하기 시작하고 탈북자 수도 줄어들면서 정보 수집에 어려움이 있어 흔들기에 나섰다는 분석이 있다. 아니면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제 본격적인 붕괴 프로그램에 들어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부시 등장 이후 ‘붕괴 공작 전문가’ 득세



분명한 것은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정보국 내의 세력 판도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즉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붕괴를 주도했던 붕괴 전문가들이 득세하고 있고, 그들이 제시한 붕괴 프로그램이 주로 채택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자금이 그쪽으로 편중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은 국제 비정부기구와 국제 기구들 상황이다. 9·11 테러 이후 국제적인 지원 자금이 주로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쏠리면서 대북 관계에 관여해온 비정부기구나 국제기구는 자금 고갈 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가장 큰 돈줄인 미국 정부의 정책 선회에 맞추어 ‘자극적’ 행동에 앞장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집단 망명 사태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쪽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얼마 전 국내의 한 대학 교수는 국제 기독교 단체의 후원으로 유럽 각국의 대북 정책 담당자 및 비정부기구·국제기구 담당자 등을 인터뷰하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상당 부분이 북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부시 대통령의 인식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고, 저런 정권은 붕괴시켜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붕괴 방법에 대해서도 아주 구체적이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한편으로는 중국의 식량 및 경제 지원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국제기구가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이 앞으로 혼란 상황에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고, 이 경우 북한을 지원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이런 결정적인 시점에 세계식량계획(WFP) 등 국제기구가 식량 지원을 일거에 중단하면 북한이 더 버틸 수 없을 것이라는 섬뜩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들의 견해는 미국측과의 빈번한 학술 교류를 통해 얻어진 결론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중국 분열이다. 북한 붕괴는 그 전 단계 조처에 불과하다”라고 덧붙였다.



비정부기구와 국제기구를 양축으로 하는 부시 행정부의 북한 흔들기는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다. 북한 고위층의 갑작스런 망명, 국제원자력기구의 조기 사찰 압력과 연계된 조처들 또는 갑자기 국제기구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서 식량 지원을 중단해 북한 내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방식, 이번처럼 비정부기구들이 가세해 대량 탈출을 유도하는 방법 등이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올해 아리랑 축전 등을 계기로 상당한 폭의 대외 개방 조처를 취할 예정이고 또한 남북 관계도 해빙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를 우려하는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방해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고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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