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파동’ 지구촌 다시 덮치나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2.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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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 유가에 기름 시장 요동…세계 경제 회복세에 ‘찬물’



중동의 이라크와 남미의 베네수엘라. 원유 생산과 수출에서 각각 세계 10위 안에 드는 굴지의 산유국들이다. 두 나라는 또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이자 세계 경제의 견인차인 미국에 각각 세 번째(베네수엘라)와 여섯 번째(이라크)로 많은 원유를 공급해 왔다. 이들 두 나라가 최근 미국은 물론 세계 기름 시장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오랜 불황의 터널을 지나 이제 막 경기 회복의 기지개를 켜던 세계 경제는 자칫 장기화할지 모를 유가 불안의 전망 앞에서 몸서리를 치고 있다. 새롭게 조성된 위기 상황의 1차 진원지는 최근 한창 피바람이 불고 있는 중동 지역이다. ‘반테러 전쟁’을 빌미로 한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공격이 보름 넘게 이어지자 같은 아랍권 국가이자 미국·이스라엘과 견원지간인 이라크가 나선 것이다. 지난 4월8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데 대한 보복으로 30일간 원유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라크의 최근 원유 수출 규모는 하루 2백만 배럴.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수출 규모 ‘하루 6백만 배럴’에 비하면 3분의 1이다. 하지만 이라크의 금수 조처는 나름으로 무시하지 못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라크의 원유 수출분은 대개 미국으로 향하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상당한 압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후세인 대통령은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이같은 조처를 발표하면서 “이번 결정은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조처일 뿐, 그 밖의 다른 나라에는 피해를 줄 의사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베네수엘라. 멕시코에 이어 중남미에서 두 번째로 산유량이 많고, 미국에는 서열 3위 공급국인 베네수엘라의 정국 변화 과정은 세계 석유 시장 참여자들에게 희비를 엇갈리게 했다. 베네수엘라의 현재 상황은, 지난해 12월 페르난도 델 라 루아 대통령의 몰락과 사상 최악의 ‘국가 부도’ 사태를 낳았던 아르헨티나와 닮은꼴이다. 1998년 12월 정치 개혁·부패 일소를 내걸고 압도적인 지지율로 집권했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당초 공약과 달리 독재 정치를 강화하자 군부와 일부 노조가 들고 일어나 퇴진 운동을 벌인 것이다.


이라크·베네수엘라 악재 겹쳐





남미 최대의 석유회사인 베네수엘라 석유회사(PDVSA)가 가동을 멈추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이 회사를 독재 권력의 기반이라고 낙인 찍고 지난 4월8일 최고 경영진 퇴진 운동과 파업을 벌였다. 베네수엘라 사태는 지난 4월12일 군부에 의해 차베스 대통령이 ‘제거’되면서 일단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가 4월14일 차베스가 권좌에 다시 복귀하는 등 반전을 거듭했다. 베네수엘라는 앞으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할당량을 무시하고 원유 생산량을 늘릴 가능성이 있어 또 다른 시장 교란 변수로 등장했다.


이라크·베네수엘라 발(發) 악재가 동시에 겹치면서 세계 원유 시장은 크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4월8일 이라크가 원유 금수 조처를 발표한 직후, 영국 런던의 원유 선물 시장에서 브렌트유 5월 인도분 가격은 하루 사이에 1.06 달러 오른 27.05 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날 미국 뉴욕 거래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런데 차베스 대통령이 실각하고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이 곧 재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차베스 대통령 실각 소식이 알려진 지난 4월12일, 영국 런던 시장에서 브렌트산 원유 5월 인도분 가격은 오후 한때 24.70 달러까지 떨어졌다. 유가 불안 요인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원유값이 1주일간 큰 폭으로 오르내리는 ‘널뛰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전문가들 “극단적 파국은 없을 것”


국제 유가는 지난 3월 초 배럴당 22 달러 수준이던 것이, 중동 사태가 악화하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 왔다(아래 도표 참조). 지난해 말 석유 전문가들은 2002년도의 국제 유가를 전망하면서, 큰 이변이 없는 한 배럴당 평균 25 달러 수준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이같은 예측은 이미 이라크의 원유 수출 중단 선언이 있기 전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전문가들은 위기를 걱정하면서도 1973년 오일 쇼크 때처럼 극단적인 파국이 오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 중 비둘기파에 속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예비 생산 능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예비 생산 능력은 하루 2백만 배럴로, 이라크의 수출량과 맞먹는다. 둘째, 러시아 등 비석유수출국기구 국가의 산유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 ‘만일의 사태’에 대안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초에 비해 기름값이 40%나 뛴 현재의 상황이 대수롭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기름값이 오르면 서서히 회복기로 접어들고 있는 세계 경제가 또 한번 발목을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모건스탠리 사의 스탠리 로치 수석 경제 분석가의 전망에 따르면, 기름값이 배럴당 40% 오를 경우 2002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당초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2.8% 수준의 3분의 1로 줄어든다.





유가 상승은 특히 미국의 외교 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국제 정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실제로 변화의 증거도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최근 분석 기사에서 ‘당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에 미온적이었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지난 4월6일 갑자기 적극 개입 쪽으로 방향을 바꾼 진짜 이유는 유가 앙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분석 기사에 따르면, 회복기 미국 경제가 기름값으로 타격받을 경우 부시 대통령은 올해 안에 있을 중간 선거는 물론 재선도 장담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유가 안정 노력은 세계 경제 측면에서 크게 해될 것은 없다. 문제는 미국의 이해가 걸린 지점의 정치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차베스 세력을 밀었던 미국은 유가 앙등과 공급 불안을 야기한 베네수엘라 사태가 조속히 마무리된 것을 반기고 있다. 지금 미국의 눈길은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중인 베네수엘라 사태와, 변함 없는 ‘눈엣가시’인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에게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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