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찍히면 목이 달아나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
  • 승인 2002.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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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행정부, 국제기구 고위 관리 ‘살생부’ 작성…IPCC·OPCW 의장 등 여럿 ‘희생’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에 근무하는 고위 관리들이 요즘 미국의 ‘살생부’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최근 반 테러 전쟁은 물론 범세계적 사안과 관련해 미국의 정책에 직·간접으로 반기를 들어온 관리들에 대해 강제 퇴임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간 뒤부터 이들의 불안감은 더하다.




외교 관측통들에 따르면, 살생부에 오른 첫 희생자는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이다. 아일랜드 대통령 출신으로 4년 전 현직에 임명된 로빈슨 여사는 오는 9월 재선이 확실시되었지만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미국의 강력한 반대 움직임을 일찌감치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녀가 미국의 눈 밖에 난 것은 지난해 9월 남아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 인종 차별 철폐회의’에서 반 이스라엘적인 내용을 담은 선언문 초안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선언문 초안은 ‘시오니즘의 인종 차별적 관행이 증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스라엘을 ‘인종 차별 관행국’으로 낙인 찍어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미국은 더반 회의 직후 그녀를 조기 퇴임시키기로 결정하고 그동안 재선 반대 로비를 펼쳐왔다.



로빈슨 여사에 이은 두 번째 희생자는 기후변화정부간회의(IPCC) 로버트 왓슨 의장이다. 이 기구는 지난해 7월 지구 온난화가 당초 예상보다 2배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그 주범으로 선진국의 산업 공해를 꼽았다. 왓슨 의장은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 온실 효과를 유발한 공해 물질 방출량에 관한 감축 기준을 제시한 교토 의정서를 하루빨리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구 온난화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자 이를 정면으로 일축했다.



외교 문제 분석가인 이언 윌리엄스는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문제의 보고서가 나온 뒤 미국 굴지의 석유 메이저인 엑슨 모빌이 백악관에 보낸 비밀 메모를 통해 노골적으로 왓슨 의장의 강제 퇴임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폭로했다. 전임 행정부가 서명한 교토 의정서를 파기한 부시 행정부는 결국 지난 4월19일 그를 강제 퇴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의 후임인 인도 출신 경제학자 라젠드라 파차우리 씨는 자신이 개발도상국들의 강력한 후원 덕분에 임명되었다고 말하지만, 국제 환경 관련 단체들은 미국이 강력하게 로비한 결과라고 본다.



미국 비위만 거슬러도 자리 보전 어려워



왓슨 의장이 물러난 지 정확히 나흘 뒤에는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호세 마우리시오 부스타니 의장이 타의로 물러났다. 5년 임기 의장 직에 만장일치로 재선된 지 1년밖에 안된 시점에 퇴임한 것이다. 브라질 출신인 부스타니 의장은 이 기구 창설 초기부터 맹활약해온 터라 국제적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그는 첫 임기 5년간 화학 무기 2백만 개와 전세계 화학 무기 시설 가운데 3분의 2를 파기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50여 개국에서 1천1백 회에 달하는 사찰을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미국이 부스타니 의장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부시 행정부가 엉뚱하게 그의 ‘재정 관리 능력 부재’ 등을 트집잡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진짜 이유는 그의 반미적 태도였다. 그는 미국 내 화학 무기 시설 사찰 요원의 출신국을 자체적으로 정하겠다는 미국의 의사를 정면으로 거부했다. 나아가 국내 미신고 화학 무기 시설에 대해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국제 사회의 사찰을 피할 수 있도록 한 미국법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그가 결정적으로 미국의 비위를 거스른 대목은 화학무기금지기구에 이라크도 참여시키자고 제안한 것이다. 만일 이라크가 이 기구에 가입할 경우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사찰 거부를 이유로 이라크를 공격하려던 미국의 계획은 명분을 잃게 된다. 결국 참다 못한 부시 행정부는 올해 초 브라질 정부에 부스타니 의장을 소환하라고 공식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가 반발하자 미국은 초강수를 두었다. 그가 현직에 잔류할 경우 이 기구에 분담금을 내지 않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처럼 국제적 신망을 받아온 국제기구 책임자들이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사퇴하게 된 배경에는 부시 행정부 들어 더욱 기세 등등해진 우익이 도사리고 있다. 특히 부스타니 의장이 사퇴한 배후에는 부시 행정부 최고의 보수 강경파로 꼽히는 존 볼턴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살생부에 올라 있는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다. 외교 관측통들이 첫손꼽는 후보는 유엔감시검증사찰위원회(UNMOVIC) 한스 블릭스 위원장이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을 지낸 블릭스 위원장은 부시 행정부 처지에서는 무시 못할 ‘요주의 인물’이다. 그가 추진 중인 이라크 무기 사찰 계획 여하에 따라 미국의 이라크 공격 시나리오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유엔 차원의 이라크 무기 사찰을 위해 구체적인 실무 계획을 착착 진행해 왔다.



만일 사찰단의 조사 결과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가 모두 파괴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이라크는 유엔이 주도하는 경제 제재에서 풀려나게 된다. 또 미국이 이라크의 사찰 거부를 빌미로 치밀하게 계획 중인 군사 공격 명분도 약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미국은 블릭스 위원장이 주도하는 사찰 계획이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대량 살상 무기 문제와 관련한 ‘면죄부’를 주지 않을까 몹시 우려하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군사 공격론의 선봉장 격인 폴 월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이미 중앙정보국(CIA)에 블릭스를 축출하는 데 필요한 정보 수집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월포위츠를 비롯한 강경파는 블릭스의 제안에 탄력이 붙을 경우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기회를 완전히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위험?



그밖에 최근 미국 우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샤론 정부와 불화를 빚고 있는 테르제 라르슨 유엔 중동특사의 거취도 주목거리다. 그는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곳으로 알려진 예닌 지역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자고 제안했다가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미국 우파의 눈 밖에 났다. 또 유엔난민구호활동 책임자인 피터 한센 씨 역시 반 이스라엘 성향 때문에 자리 보전이 불안하다는 애기가 나돌고 있다.



중동 문제와 관련해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온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부시 행정부 내 우파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인물이다. 세계적 지명도와 영향력을 가진 그의 비중을 감안할 때 미국의 압력에 밀려 그가 도중하차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내 우파가 ‘관리 능력 부재’ 같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 본격적인 공세에 나설 경우 아난 총장 역시 임기 내내 퇴임 압력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외교 관측통들은 내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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