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 희망, 또 한 손에 불안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2.1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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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 브라질 첫 좌파 대통령 당선…막대한 대외 채무 해결이 지상 과제
삼바 춤과 축구의 나라 브라질에 세계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축제나 월드컵 때문이 아니다. 지난 10월27일, 남미 최대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 정권이 닻을 올리는 정치 이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브라질판 선거 혁명이라고 해도 좋을 이번 정치 이변의 주인공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올해 쉰여섯인 금속 노동자 출신으로서, 대통령 도전 ‘4수’ 끝에 지난 10월27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극적으로 꿈을 이룬 집념의 인물이다.



그의 대통령 당선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과 학력이다. 브라질 북동부 베르남부쿠 주의 빈농 출신인 그는 입지전적 인물인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울고 갈 정도로 파란만장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일찍부터 가난에 내몰려 소년 시절 땅콩 농장 노동과 구두닦이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달고 살았던 인물이다. 덕분에 그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이다.



룰라는 1980년 노동자들이 좌파 지식인들과 연합해 만든 브라질노동당(PT)의 창당 산파역을 맡아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대통령 꿈을 이루기 위한 대장정도 이를 기반으로 삼아 시작했다. 그는 브라질 민주화 이후 처음 치른 1989년 대통령 선거부터 후보로 나서기 시작해 1994년과 1998년 그리고 이번까지 네 번을 연거푸 도전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브라질노동당 창당 이전까지 그는 브라질 최대 노조였던 철강노조 위원장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지난 10월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서 브라질노동당 후보로 나선 룰라는 61%의 지지를 얻어 현 집권당인 중도우파연합이 내세운 호세 세라 후보를 20% 이상 격차로 따돌리고 브라질의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이 확정되자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 등 브라질의 주요 도시에서는 브라질노동당 지지자 수십만 명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늦도록 춤을 추며 룰라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했다. 이와 동시에 세계의 좌파들이 즐겨 찾는 진보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들도 불이 나기 시작했다. 남미에서의 승전보를 시시각각 알리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한 메시지들이 폭주했던 것이다.



룰라는 당선 첫 소감으로 “희망이 공포를 이겼다”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브라질 대선에서 룰라 당선자와 그가 이끄는 브라질노동당이 ‘급진·좌경’이라는 보수파와 반대파의 끈질긴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을 어떻게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의미심장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이번 대선은 사실상 1995년 연임에 성공해 현재까지 8년이나 집권하면서 브라질 경제를 벼랑으로 몰아세운 페르난도 카르도수 현 대통령의 실정을 심판하는 성격이 짙었다.



실제로 브라질은 최근 몇년 동안, 특히 한국과 마찬가지로 ‘IMF 수술대’에 올랐던 1998년의 경제 위기 이후 심각한 외환 위기와 빈부 격차에 시달려 왔다. 브라질의 대외 부채 규모는 지난 2/4 분기 현재 브라질 국내총생산의 40%에 이르는 1천7백20억 달러. 이는 브라질 한 해 수출액의 330%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규모다. 브라질은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인구 증가율에도 못미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빈부 격차도 만만치 않아, 전국민의 60%가 빈민층일 뿐 아니라, 최고 부유층 1%의 소득이 저소득층 50%의 소득과 맞먹는다. 유권자의 40%는 글을 아예 모르거나 겨우 한두 자 읽을 정도 까막눈이다.






부의 재분배·문맹 퇴치 공약 주효



남미 정치에서는 ‘바늘에 실 따라 다니듯’ 나타나는 기존 정치판의 부정·부패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도 룰라의 승인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브라질노동당과 자웅을 겨루었던 현 집권당인 중도우파연합은, 이번 대선 과정에서 당초 후보로 내세웠던 호시에나 사르니가 부패 추문에 연루되자 부랴부랴 후보를 교체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브라질 국민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자기네를 구출할 사람으로 룰라와 브라질노동당을 선택했다. 이는 브라질노동당이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경제난을 헤쳐 가기 위한 방안으로 현 카르도수 정권이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토지 개혁을 통한 부 재분배·정부 지출 확대 등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브라질노동당은 문맹 퇴치를 위해 18세 이상 모든 문맹자에 대해 본인이 원할 경우 대학 및 사회 교육 차원의 산학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정부가 기회를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브라질 국민은 물론 전세계 좌파가 룰라의 당선을 환영하고 나서는 이유도 이처럼 신자유주의 물결과 대별되는 상대적 진보성에 있다. 영국의 좌파 잡지 〈레드 페퍼〉의 주요 필자인 로저 버바흐도 룰라와 브라질노동당이 자기네 지역 기반인 브라질 남부의 리우그란데루솔 주에서 실시했던 ‘직접 민주주의’ 실험의 성공 사례를 예로 들며, 새로운 세계의 희망이 보인다고 룰라 정권 출범을 크게 찬양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 중남미 각국 지도자들도 한결같이 그의 국제 무대 등장을 환영했다. 특히 성향 면에서 ‘초록이 동색인’ 베네수엘라의 휴고 차베스 대통령은, 미국 부시 대통령이 내세운 ‘악의 축’에 빗대어, 룰라가 등장한 것이 ‘중남미에서 선의 축을 이루었다’고까지 공언했다. 쿠바·베네수엘라·브라질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룰라는 이처럼 좌파 동지들의 대대적이고 열렬한 축복을 받으며 내년 초 대통령 취임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가 모두에게 환영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브라질에 막대한 돈을 투자한 해외 투자가들, 특히 월 스트리트의 금융 자본은 브라질의 좌파 정부가 대외 부채에 대해 혹시 지불 유예를 선언하지 않을까 하여 일찍부터 룰라 후보에 대해 ‘자격 시비’와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쳤다. 즉 경제 식견이 전혀 없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브라질 경제가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고,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그의 평소 신념이 국제 조류를 거슬러 브라질을 파멸시킬 우려가 있다며 꾸준히 ‘위기론’을 조성해 왔다.



룰라와 브라질노동당은 이같은 공세에 대해 일단은 ‘대외 채무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막대한 대외 채무 문제가 브라질 경제는 물론 정치 개혁의 발목까지 잡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관측통들에 따르면 대외 채무 문제는 브라질노동당 내부에서조차 잠재적인 갈등 요소로 잠복해 있다. 브라질노동당을 비롯한 브라질의 진보 진영(예컨대 ‘주빌리 2000’이 대표적)은 전통적으로 브라질의 대외 채무, 특히 그 중에서도 과거 부패한 군부 정권 때 발생한 빚더미에 대해서는 지불할 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펴왔다. 바로 이같은 원칙론이, 막상 이를 실현하겠다고 나설 경우, 국제 신인도 하락 등 엄청난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는 현실론과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갈등은 룰라의 개혁을 후퇴시키는 것은 물론 진보 진영 내부의 느슨한 동맹을 해체시킬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취약한 정치 기반도 걸림돌
일부 진보 진영 인사들이 룰라의 대통령 당선을 두 가지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국의 진보적인 저술가 조지 몸비어트는 10월29일자 <가디언> 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룰라의 당선으로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맞보게 됐다’고 주장했다. 브라질 역사상 최초로 미천한 출신의 좌파 운동가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승리’요, 바로 그 때문에 자본 시장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이 룰라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지출을 하지 못하도록 간섭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실패’라는 것이다.



차기 정부의 또 다른 과제는 브라질 전체로 볼 때 아직은 취약한 집권당의 정치 기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이냐 하는 문제다. 룰라가 당선한 직후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대선에서 룰라가 비록 60% 이상 지지를 얻어 당선되기는 했지만, 브라질 의회 전체 의석 5백13개 가운데 브라질노동당이 차지한 의석이 92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들어, 차기 정부의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고 룰라 정권 등장이 중남미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룰라 정부는 선택을 강요하거나 스스로 군림한 정권이 아니다. 룰라 정권 등장은 당선자 스스로가 자신 있게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꿈꾸고, 이를 위해 싸운 브라질 국민 모두의 이름으로 탄생한 정권’이라는 점에서 중남미 민주주의에 또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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