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도 싫고 전쟁도 싫다”
  • 요르단 암만·김진화 편집위원 ()
  • 승인 2003.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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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요르단 국경 지대는 지금 초긴장 상태이다. 바그다드의 표정도 어둡다. 곧 닥칠 전쟁의 재앙 앞에서 이라크 국민들은 분노와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동쪽으로 280km쯤 달리면 이라크로 들어가는 루웨이시드 국경 초소에 이른다. 초소 뒤쪽 황량한 벌판에서는 지금 땅고르기가 한창이다. 이라크에서 몰려올 난민들을 위한 난민촌을 짓고 있는 것이다. 요르단 정부는 전쟁이 나면 난민이 10만명쯤 몰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991년 1차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이라크 난민 1백20만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요르단은 이번에 전쟁이 터지면 국경을 봉쇄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광활한 사막을 건너 밀려오는 난민들을 모조리 막아낼 묘수는 없는 듯하다. 그 때문인지 이 지역에서만 큰 우물 4개를 파서 500m 아래 지하수를 퍼올리고 있다. 요르단 정보 당국은 개전 초에 60만 난민이 이란·시리아·요르단 국경을 넘어올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암만에는 이라크 난민이 아직도 30만명이나 살고 있다. 개중에는 반체제 지식인 군인 언론인 학자 사업가 대학생 여성지도자도 있다. 외국 기자들도 2백여명 진을 치고 있다. 이라크인과의 접촉이 극도로 통제된 바그다드보다 암만으로 들어오는 난민을 통해 이라크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고 인터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렵사리 얻은 이라크 입국 단수 비자를 ‘결정적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기다리는 외신 기자들도 많다.


체념 탓인지 생필품 사재기 안해


두 번째 유엔 경제 봉쇄 아래 있는 이라크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하나. 육로로 암만에서 루웨이시드 초소를 거쳐 일직선으로 달리면 바그다드에 이른다. 특별 허가를 받은 국제기구의 소형 전세 항공기에 편승할 수도 있지만 하늘의 별 따기이다. 바그다드까지 자동차로 6∼9시간 걸리는 국도 좌우 벌판에는 마치 떼죽음당한 독수리들의 시체인 양 볼썽사나운 검은 물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암만-바그다드를 오가는 자동차들이 뜨거운 아스팔트길을 총알 택시처럼 달리다가 터지고 찢긴 타이어들을 내버린 것이다.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티그리스 강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 바그다드 시민들은 지친 표정이다. 12년간 계속되는 경제 봉쇄로 일상 생활, 특히 어린이들의 건강이 큰 위험에 처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달러당 0.7디나를 유지해온 이라크 화폐는 지금 암시장에서 2천5백분의 1로 떨어져 있다. 도심 광장에는 여기저기 아침부터 벼룩시장이 선다. 양은 그릇, 포크, 나이프, 헌 신발, 양말, 구멍 난 보자기, 대추, 바나나, 오렌지에서부터 뱀, 전갈, 새끼 원숭이에 이르기까지 돈 되는 것은 모두 내다 판다. 그래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농산물과 시리아 요르단·이란·사우디아라비아 국경을 통한 밀수 덕분이다. 정부는 생필품 밀수는 눈감아 주고 있다.


이라크-이란 전쟁, 1차 페르시아 만 전쟁, 북부 쿠르드족 반란, 남부 시아파 내란, 미국의 간헐적 폭격 등 지난 20년간 전쟁과 내란에 시달려온 이라크 국민은 코앞에 다가온 2차 페르시아 만 전쟁 위협을 체념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쌀, 콩, 밀가루, 식용유, 양초 등 기초 생필품을 마련할 뿐 사재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라크 점령하면 이란이 다음 목표”


시민들은 미군이 ‘침략’해 올 것으로 믿고 있다. 정부도 지금껏 금지되어온 단파 라디오나 위성 텔레비전 안테나 설치를 눈 감아 주고, 인근 국가의 방송 청취를 허용하고 있다. 아랍과 세계 여론이 반미·반전으로 돌아서 이라크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최근 국민 총동원령을 내려 17∼50세 남자들을 민병대로 등록시키고, 시가전에 대비해 도시를 떠나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항전 시늉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국민은 극히 적다고 탈출한 난민들은 증언한다.


“사담 후세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1991년 이라크 침공 직전 이렇게 말했다. 후세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인지는 알 길 없으나, 이라크 국민에게 가장 공포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1979년 집권 이래 그는 비밀 경찰과 군을 동원해 숨막히는 공포 정치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해왔다. 반체제 인사들을 외국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고, 시체를 ㄱ자 모양 나무에 매달아 시내 한복판에 전시하기도 해, ‘바그다드의 백정’이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기자가 여섯 차례 이라크를 찾을 때마다 후세인 초상화·동상의 숫자와 크기는 기하급수로 늘어났고, 대문짝의 10배쯤 되는 초상화는 공포에 질린 국민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후세인은 바그다드 전역에 대통령궁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자주 이용한다는 줌후리아(공화국) 대통령궁은 철통 같은 군사 요새다. 대통령궁을 중심으로 반지름 10km 안에는 정예 군부대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만일 한 부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다른 부대가 반격할 수 있도록 계획되어 있다는 것이다. 외곽 부대 앞을 통과하는 일반 차량은 속도를 늦출 수도 멈출 수도 없다. 물론 걸어가는 사람도 볼 수 없다.


‘대량살상무기로 미국과 서방을 위협하는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제거해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고 민주 국가를 세워 중동 평화와 안정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전쟁 논리다. 1년 전 암만으로 탈출한 이라크 언론인 사라 알 나스와리는 “사담(후세인)이 없어지길 바라지 않는 이라크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려고 이라크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반대다. 우리는 지난 20여 년간 수많은 목숨을 잃었고 경제는 파탄 상태다. 전쟁의 참화를 겪어본 민족만이 인명을 존중한다. 한국인이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전쟁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우리에게 사담과 전쟁 중 택일을 강요한다면,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라크와 주변 아랍 국민의 첫째 화두는 ‘석유 전쟁론’이다. 한마디로 이번 전쟁은 미국이 중동 유전을 장악하기 위해 강요하고 있는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미국은 걸림돌인 후세인을 제거해 세계 제2의 산유국 이라크를 점령한 후, 다음 목표인 이란을 칠 것이다. 미국은 중앙아시아의 카스피 해 연안국들로부터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유전과 천연 가스 확보를 노리고 있다. 만일 미국의 야심이 이루어진다면 지구상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국가는 없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아랍인들의 공론이다.





국제 환경 달라져 아랍권 ‘한목소리’


두 번째 화두는 ‘종교 전쟁론’이다. ‘이슬람을 업신여기고 아랍인을 경멸하는 종교·인종 차별 의식이 미국인 특히 조지 부시 대통령의 심리 밑바닥에 깊숙이 깔려 있다. 때문에 부시 대통령 부자는 대를 이어 21세기 십자군을 이끌어야 한다는 허망한 사명감으로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설득력이 부족한 단순 논리 같지만 아랍 민중이 심정적으로 느끼는 반미 감정의 일단이다.


1991년 1차 페르시아 만 전쟁과 2003년 2차 페르시아 만 전쟁을 둘러싼 국제 환경은 크게 다르다. 1차전의 명분은 이라크에 점령된 쿠웨이트 해방이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 독일 한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36개국의 지원을 받았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모로코 등 아랍 국가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이슬람 국가조차 전투 병력을 파견했다. 미군은 바드다드 문턱에까지 진격해 후세인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지금, 2차 페르시아 만 전쟁을 공개 지지하는 아랍-이슬람 국가는 하나도 없다(터키 제외).


요르단 대학 국제전략연구소 사이드 이브라힘 교수는 “아랍과 이슬람권이 한목소리로 미국에 반대하기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외하곤 이번이 처음이다. 터키 정부가 미국 편에 섰으나 국민은 전쟁을 반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유럽인이라고 주장하며,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할 형편이다. 아랍 민중은 실로 오랜만에 세계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민족이 아님을 느끼고 있다”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요르단에서 제일 오래된 알 호세인 사원의 이맘(기도 인도자)은 “전쟁이 나든 안 나든 아랍-이슬람권의 반미 감정은 격화하고 테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측하고, 미국의 전쟁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흥분한다. “미국이 주장하는 대량살상무기를 조사하기 위해 유엔이 조사단 파견을 결의했고 미국도 찬성했다. 조사단은 아직 확실한 증거가 드러난 것이 없으니 조사 기간을 연장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대량살상무기 은닉처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당장 전쟁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그토록 전쟁을 서두를 이유가 무엇인가?”


1차 페르시아 만 전쟁 때와 크게 달라진 국제 환경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에도 이미 파병을 요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 1월 타하 라마딘 이라크 부통령은 일본 민주당 스토 노부히코 의원에게 “일본은 1991년에도 참전했고, 유엔 경제 제재 완화에도 반대했다. 일본은 미국·영국에 이어 제3의 적국이다”라고 항의했다.


레바논 일간지 〈알 하야트〉의 레이몽 후리 기자는 "한국은 미군이 전쟁을 벌이는 곳마다 참전했다.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이라크 전에도 다시 참전한다면, 한국은 일본처럼 아랍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한국인이 아랍 땅에 들어와 아랍인을 살상하는 일을 도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기자가 한국과 미국의 역사적 특수 관계로 한국의 선택 폭이 극히 제한되어 있음을 설명해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지난 1월 1차 페르시아 만 전쟁 12주년을 맞아 아랍 민중에게 호소했다. “8백50년 전 몽골 군대가 이라크를 침략해 우리 땅을 능멸했다. 위대한 우리 전사들은 죽음으로 바드다드 성곽을 지켰다. 현대판 몽골인들인 미국 침략자들에 대항해 우리는 다시 한번 죽음으로 조국을 지킬 것이다.”
한국인은 몽골인이 아님을 이라크 국민과 아랍 민중 그리고 전세계 무슬림들은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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