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에도 ‘한류 바람’ 솔솔
  • 부에노스아이레스·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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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에 높은 관심…김기덕 감독 작품, 절찬 상영중
중국과 일본, 동남아를 거쳐 미국과 중동까지 뻗어나가는 한류 바람이 마침내 남미에 상륙했다. 한류 바람의 선봉은 국제적으로 한창 성가를 얻고 있는 한국 영화다.

아르헨티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르헨티나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인식이 날로 달라지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한국에서 보자면 지구 정반대편에 있다. 대척점에 있는 나라다. 그런 만큼 ‘아르헨티노’의 한국 인식은 거의 무지에 가까웠다.

태극기 대신 인공기를 게양하기 일쑤였고, 언론은 중국인 마피아를 한국인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위생 상태를 점검하는 시청 직원이 한국 식품점의 김치·된장에 ‘냄새 나는 썩은 식품’이라고 락스를 뿌리는 일도 있다. 거리를 달리는 현대·기아·대우의 한국산 자동차, 그리고 아르헨티나 방방곡곡으로 진출한 가전제품과 이를 선전하는 광고판이 없었다면 ‘코레아’는 아직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한 가난한 나라였을 것이다.

아르헨티노들에게는 묘한 우월감이 있다. 유럽이나 미국이 아니면 내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살다가 망한 부잣집 아들의 자존심 같은 것이다. 그런 아르헨티나가, 더욱이 최고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이 최근 한국의 김기덕 감독을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다. 일간지 라 나시온이 김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개봉 소식을 전하면서 ‘국제 영화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감독’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 신문은 ‘김기덕의 계절들’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까지 실었고, 김감독의 영화에 별 5개를 주었다. 다른 신문은 입장권이 매진되었다고 보도했다.

한국 영화가 아르헨티나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99년 제1회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영화제가 인연이 되었다. 이 영화제에서는 장선우 감독의 <나쁜 남자>가 상영 3시간 전에 표가 매진되어 현지인·교포 2백여 명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재아르헨티나 한인 이민 40년사> 발간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한인이민연구회 자료에 따르면, 2002년 제3회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또 <박하사탕> 외에 <오! 수정> <반칙왕> <애(愛)> 등 10여 편의 영화가 출품되어, 한국 영화의 위상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올해로 6회째를 맞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영화제는 오랜 역사를 지닌 마르텔 플라타 국제영화제와 쌍벽을 이루는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해가 갈수록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영화는 이 두 영화제에 계속 출품되어 왔다. 지난해 마르델 플라타 영화제 출품작 <집으로>는 아르헨티나 일간지 클라린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옥 같은 작품’이라고 소개되었고, 시립 문화센터(레콜레타) 시사회에서 관람객의 극찬을 받았다.

노 대통령 방문 맞춰 대규모 시사회 계획

아르헨티나에 일고 있는 한국 영화 바람을 한류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르헨티나 주재 한국대사관 박완규 공보담당 참사도 “한류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아르헨티나에서 한국 문화 상품, 특히 영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그러나, 앞으로 한달 뒤 ‘이젠 진짜 한류다’라는 표현으로 바뀔지 모른다.

아르헨티나의 한국 교포들은 그 기점을 오는 11월로 예정된 노무현 대통령의 아르헨티나 방문으로 꼽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교육 도시 코르도바에 있는 코르도바 대학은 노대통령의 방문에 때맞추어 <취화선> <무사> 등 한국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하는 시사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만으로 한류 바람을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다. 현재까지 아르헨티나의 영화 수입업체에 의해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는 <집으로> <거짓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 세 편에 불과했다. 한국대사관측은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일단 검증된 이상, 더 많은 한국 영화가 수입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류가 본격적으로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안방 극장을 파고들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 한국 드라마는 아르헨티나의 ‘이질적인 문화 정서’라는 장벽을 넘어야 한다. 페루·베네수엘라·멕시코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통할지 모르지만, 서구적 정서가 짙은 아르헨티나에서는 외면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류가 한국 영화를 앞세우며 빠른 속도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장래가 유망한 신인 감독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에스켈 루카스 감독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밝힌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가 이같은 전망을 가능케 한다. 그는 ‘유럽 유학 시절에 본 한국 영화는 매우 신선한 충격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며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도 한껏 기대를 보였다.

과거 아르헨티나에 선보인 한국 영화는 대개가 ‘한국 홍보’ 차원에서 대사관측이 마련한 시사회를 통해 소개된 작품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성도 떨어지고, 시사회 관람객도 한국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아르헨티나 인사나 교포가 주류였다. 하지만 이제 이같은 풍경은 옛말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10개 영화관에서 동시 개봉되어 절찬 상영 중이다. 표를 끊고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 사이에서 한국 교포를 찾기는 어렵다. 10월12일 현재 김감독의 영화는 관람객 순위 8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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