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떠는 중국발 곡물 파동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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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량 감소해 자급자족 ‘빨간 불’…가격 앙등 따른 시장 교란 ‘불 보듯’
미국의 저명한 중국 전문가인 앤드루 네이선과 로버트 로스는 1997년, 중국 안보 관련 서적으로는 이미 국제적인 ‘고전’이 된 <만리장성과 텅 빈 성채(The Great wall and the Empty Fortress)>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한 바 있다. ‘단순히 (인구가)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중국은 무슨 일을 하든 세계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 이민을 가거나, 세계 시장에서 곡물을 사들일 때에도, 그리고 도로를 건설하거나 차량을 운전할 때에도.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면 세계 식량 자원이 바닥날 수 있고, 취사와 난방에 조개탄 사용량을 줄이지 않으면, 지구의 대기 상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다. 인구 규모 탓에 중국을 빼놓고는, 어떤 국제 사안도 해결할 수 없다.’

5년 연속 식량 생산 내리막길

중국 산업이 ‘세계의 공장’ 소리를 들으면서 본격적인 이륙기에 접어든 이후 이들의 7년 전 예측이 현실화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에너지 소비 대국이 되면서, 특히 동아시아의 에너지 확보 전쟁을 점화시켰다. 지난해 한국은 중국의 폭발적인 철강 수입 사태로 인해 건설 현장에서 철근 품귀 현상까지 경험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앞으로 닥칠 본격적인 시련의 ‘예고편’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최근 곳곳에서 중국발 식량 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부쩍 잦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발 식량 위기 가능성은 지난해 하반기와 올해 초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이 직접 나서서 안정적인 식량 확보 대책을 긴급 지시하는 모습이 보이면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전체 곡물 생산은 1998년을 고비로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즉 1998년 3억9천2백만 t(대두를 합치면 5억1천2백만t·왼쪽 그래프 참조)에 이르던 곡물 생산량이 지난해에는 3억2천2백만t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중국의 식량 문제에 정통한 레스터 브라운의 설명에 따르면, 이 감소량은 역시 세계 굴지의 농업 대국인 캐나다의 한 해 전체 곡물 생산량을 넘어서는 엄청난 규모다.

이처럼 수확량이 5년 연속 내리막길을 걷자, 1960년대 혹독한 기근과 기아를 경험한 기억이 있는 ‘제4대 지도자’들이 다급해졌다. 중국은 지난 1960~1961년 대약진운동이 실패해 당시 한국 인구에 맞먹는 3천만명이 굶어죽은 참극을 겪은 바 있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자를 구성하는 인사 대부분은 당시 학생으로서 이같은 기아 사태를 직접 겪었거나 목격한 세대다. 그만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중국 당국이 팔을 걷어붙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은 역대로 저가 농산물 정책을 펴왔다. 이를 통해 비축한 비용을 산업 투자 등 현대화에 투자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부터 농산물, 특히 곡물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농산물 가격 상승은 곧장 인플레를 유발하고, 경제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

마침내 지난 2월 중국 정부는 전년도에 비해 25%(약 30억 달러)로 늘어난 특별 예산을 편성하는 등 농업지원책을 강화하고 나섰다. 중국 공산당은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바로 농업 문제’라는 사령서를 발령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태곤 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18년 만의 일’이었다.

경작 면적 감소·탈농촌 바람도 큰 영향

중국의 올해 곡물 수확은 이같은 중국 당국의 긴급 대책에 힘입어 지난해보다 다소 늘어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지난 9월에 발표한 식량 전망 보고서에서, 중국의 밀 생산량이 올해 약 5% 늘어난 9천1백만t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다. 생산량은 다소 늘어날지 모르지만, 수요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부족분을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상황은 그대로인 것이다. 현재 쌀·밀·옥수수는 중국의 3대 곡물이다. 이 중에서 밀의 수입량은 2003~2004년 4백만t에서 2004~2005년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약 7백만t으로 늘어날 것으로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전망하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농업 전문가인 마이클 괴텔은 지난 6월, 중국의 밀 수입량이 적어도 8백만t에서 1천만t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쌀의 경우도 심상치 않다. 유엔 식량농업기구는 중국의 올해 쌀 생산량이 지난해에 비해 약 12% 늘어난 1억2천만t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쌀값 상승을 막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보조금 지급과 세금 감면 등 각종 정책을 편 결과다.

하지만 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쌀도 당장 ‘지금부터’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매우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국 농무부는 중국이 올해 8백만t 이상의 밀과 함께, 쌀 100만t을 수입할 것이라는 예상치를 내놓고 있다.

중국은 또 이미 구조적으로 쌀 생산 기반이 취약해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은 최근 몇 년간 품질 좋고 맛 있는 자포니카 종 재배 면적(주로 헤이룽장성)이 증가하고 있는 반면, 인디카 종(일명 ‘안남미’)은 줄어들고 있다. 저장성·광둥성 등이 주산지인 인디카 쌀의 생산 감소 폭이 자포니카 쌀의 증가 폭을 크게 앞질러 전체적으로 쌀 생산량 저하를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산 ‘찐 쌀’이 한국에 수입되어 문제가 되었던 근본 이유도 쌀 생산량 저하와 관계가 깊다. 중국이 쌀 생산량이 줄어들자, 이른바 ‘민공미(民工米·수확한 지 5~6년이 지난 저질 재고 쌀. 도시에서 일하는 농민 노동자들인 민공이 주로 사먹는다고 해서 민공미라 이름 붙음)’를 대량으로 풀었는데, 그 중 일부가 탈색 과정을 거쳐 멀쩡한 쌀로 둔갑해 한국에까지 흘러들었던 것이다.

식량 자급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중국에서 식량 생산량이 줄어든 이유는 중국의 산업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도시화·산업화에 따른 경작 면적 감소와 농촌 인구의 탈농촌 바람이다. 레스터 브라운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의 경작 면적은 1998년 9천만ha에서 지난해 7천6백만ha로 줄어들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도 ‘2003년 한 해에만 2백50만ha에 이르는 경작지가 사라졌다’며, 이는 중국 당국이 농지를 건설 용지로 전용하거나 경작지를 산림으로 환원하는 ‘퇴경환림(退耕環林)’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토양 침식과 물 사정 악화 등 환경 악화도 식량 생산량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중국에서 밀과 쌀의 생산량이 줄어드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도 물 부족 때문이다. 관개 용수가 부족해 경작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13억 인구를 먹여 살릴 먹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에 의존한다면 상황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는 가깝게는 1990년대 이래 식량난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의 경험만 돌아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식량난은 대량 탈북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는 바로 국경을 맞댄 중국에도 엄청난 정치·사회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식량 부족분을 미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에서 수입하는 것과 지난 10년간 비축한 재고량으로 지탱해 가고 있다. 재고량 공급은 일시적인 처방일 뿐이므로, 앞으로 유일한 대안은 수입을 늘리는 길이 될 것이다. 이는 곧 국제 곡물가 앙등을 의미하는데, 그 충격파는 전세계로 확산될 것이다.

기상이변 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

국제 곡물가의 갑작스런 상승이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는 이미 1970년대에 한 차례 입증된 바 있다. 1972년 옛 소련이 기상 악화에 따른 대흉작으로 부족분을 해외에서 조달하자 전세계적으로 곡물 파동이 벌어졌다. 그 여파로 당시 전세계에 ‘식량 안보’ ‘식량 민족주의’ 구호가 메아리쳤던 사실을 당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40대 이상 한국인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주로 환경론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중국발 식량 위기는 최근 서양의 한 권위 있는 경제학자까지 그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서면서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지난 10월11일 스탠더드차타드 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제러드 라이언스 박사가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한 국제 회의에 참석해, 중국을 돌아본 결과를 설명하며 ‘전세계를 휩쓴 원자재 대란에 이어, 내년에는 곡물 파동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진원지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만약 내년에, 기후 변동에 따른 예상치 못한(이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지만) 기상 이변으로 주요 곡물 수출국이 대규모 피해를 본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식량의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도 대책을 서둘러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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