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미국 앞에 거칠 것이 무 엇이랴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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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과 닮은꼴 행보…유엔 등 국제기구도 좌지우지
지난날 중화 제국을 찾는 외교 사절들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고두의 예’를 행해야 했다. 오늘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아메리카 합중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만나려는 인사들은 일국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라도 백악관이 ‘비공식적으로’ 판정하는 의전 등급을 받아들여야 한다.

세계 정치의 중심인 미국 워싱턴은 최소한 1주일에 한 번꼴로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찾는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이들을 모두 환대하며 국사를 돌보려면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백악관의 의전은 당연히 양국 관계의 비중, 상대 지도자와의 친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백악관에서 30분 동안 회동한다는 것은 상대 지도자나 국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에 양국 정상이 합석하는 만찬까지 갖추어지면 특별한 관계를 드러내는 표시이다. 만약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초대되면, 개인적 친분이 돈독하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리고 대통령의 개인 별장인 텍사스의 크로퍼드 별장에서 만난다면, 말 그대로 ‘최고의 풀코스급 대접’이다.

부시 대통령이 2001년 백악관에 입성한 이래 크로퍼드 별장으로 초대한 지도자는 지금까지 영국의 블레어 총리·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중국의 전 최고지도자 장쩌민·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이어 최근 스페인 국왕 부처를 합해 채 10명이 안된다. 내년 1월20일로 예정된 부시 대통령의 집권 2기 출범식을 앞두고 벌써부터 떠들썩한 초호화판 잔치 준비가 미국에서 논란을 빚고 있다(73쪽 딸린 기사 참조).

부시 대통령은 4년 전에도 강한 대통령을 표방하며 등장했지만 지금은 더 강하다. 재선이 확정된 직후인 지난 11월 말 칠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이펙) 정상회의 기간에 부시 대통령이 연출했던 한 장면은 이를 지켜본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부시 대통령은 정상회의 만찬장에서 칠레 대통령과 사진을 찍을 참이었다. 이때 각국 정상들만 들어가게 된 만찬장에 백악관 경호원이 대통령을 따라 들어가려다 주최측에 의해 제지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다 말고 경호원에게로 급히 다가가 함께 입장했다. 이 장면은 에이펙 회의 전체를 담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세계에 여과 없이 방영되었다.
만약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현대판 ‘무관의 제왕’이라고 부른다면 이는 단순히 미국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을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한 수사에 그치겠지만, 지난 4년 동안 부시 대통령의 치세와 더불어 최소한 군사적으로 더 막강해진 미국을 제국이라고 부르는 일은, 국제 사회에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제국주의를 하지 않은 최초의 세계 대국”

영국 출신 소장 역사학자로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니알 퍼거슨은 최근 펴낸 책 <콜로서스(거상)>에서 미국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적 제국주의(liberal imperialism)’라고 규정했다. ‘상품·노동·자본의 자유 교환을 보장하고, 평화·질서·법의 지배·깨끗한 정부 등을 제공하는 것’을 기본 기능으로 한다는 점에서 과거 제국주의와 다르지만,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체제를 규율하고 운영한다는 면에서는 ‘제국주의가 맞다’는 것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기네가 몇몇 예외적인 경우(이를테면 1898년의 필리핀 합병)를 제외하고는 영토적 야심을 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제국주의를 하지 않은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국’임을 자랑해왔다.
그가 보기에 미국이 틀림없는 제국인 까닭은 미국이 대영제국 시대의 영국과 닮아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우선, 영국이 대영제국 해군을 통해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했듯이, 미국은 사상 유례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 세계를 ‘감시’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이 터지기 전 이미 전세계에 군사 기지 7백52개를 운영했다. 미국은 또 5대양 6대주를 다섯 개의 군사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 사령부를 세워 24시간 관할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미국의 국방 전문 기자 다나 프리스트는 2003년에 펴낸 <임무>에서, 이 사령관들(CinCs)이 ‘미국 대외정책 구조의 여타 부분과 관련된 자산과 영향력 측면에서 비할 수 없는 자원과 조직을 갖고 있다’며 미국의 대외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고 쓴 바 있다. 이들의 권한이 정치·외교·군사 부문을 포괄하고 있어 ‘현대판 총독’으로 통하고 있다.

둘째,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를 펼치며 세계 시장을 지배했듯이, 미국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 현재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구매력 기준으로 세계 전체의 21.4%를 차지했으며, 미국 달러 기준으로는 32.3%를 차지했다.두 나라의 지향점도 비슷하다. 영국 제국주의의 명분은 평화를 유지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을 자처하며 스스로 전세계의 자유와 민주를 최우선 의무로 상정해놓고 있다.

과거 제국주의라는 말은 주로 적대 국가들에 의해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북한이 미국을 ‘미제’라고 지칭하거나, 과거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이 미국을 ‘패권국’이라고 불렀던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이에 맞서 자국의 ‘제국주의적 지위와 기능’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중심부’ ‘지도력’ ‘우월성’이라는 용어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2001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특히 9·11 이후 미국인들 스스로 자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인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운 아프가니스탄 공격(2001년), ‘선제 공격론’으로 정당화한 이라크 침공(2003년) 등을 계기로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부시 2기는 ‘자유 제국주의’ 원년?

급기야 미국의 주류 학자들에게서조차 조지 부시 대통령의 대외 정책을 ‘패권주의’라고 비판하는 논자들이 나타났다. 바로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 이보 달더와 미국외교협회 부회장 제임스 린제이이다. 두 사람은 이라크 전쟁 직후 함께 펴낸 <고삐 풀린 미국(American Unbound)>에서, 부시 외교 정책의 기본 논리는 패권주의라고 못박고, 조지 부시 정부의 패권주의가 다섯 가지 철학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이 중 핵심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대표되는 홉스주의 세계에서 믿을 것은 힘이요, 미국의 이해를 지키는 데 다자주의나 국제기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달더와 린제이는 제국주의 대신 패권주의라는 용어를 썼지만, 니알 퍼거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제국주의에 대한 완곡 어법과 다를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패권을 지칭하는 헤게모니(hegemony)와 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해외 영토에 대한 직접 지배 여부인데, 제국주의라고 모두 직접 지배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퍼거슨은 주장한다.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 존 케리 후보와 치열한 선거전 끝에 재선에 성공한 뒤 양상은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섰던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최근 불거진 ‘석유·식량 프로그램’ 시비로 지도력에 타격을 입었다. 이는 많은 국제 문제 전문가들에게 미국이 아난 총장을 흔들어, 현재 진행 중인 유엔 개혁을 미국이 주도하려는 의도로 풀이되었다.

유엔 산하 기구이지만 유엔 못지 않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엘 바라데이 사무총장도 미국의 등쌀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은 엘 바라데이 총장의 전화 통화 내용을 도청해왔다. 이 사건은 이란 핵확산 문제 처리를 둘러싸고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의 견해가 갈리면서 벌어진 것으로, 사실상 미국이라는 한 국가가 국제 기구의 업무를 방해한 사건으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을 일찌감치 세계 패권국이라고 규정했던 임마누엘 월러스틴은, 현재의 미국을 ‘기울고 있는 패권국’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콜로서스>의 저자 니알 퍼거슨에 따르면, 미국 제국주의의 극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은 기원 전 49년, 이 때 로마 제국의 나이는 4백60년이었다. 미국은 올해로 이백스물한 살이다. 곧 다가올 조지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역사상 유례 없는 ‘자유 제국주의’의 원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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