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미에서도 ‘왕따’ 되나
  • 부에노스 아이레스·손정수 통신원 ()
  • 승인 2005.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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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반군 지도자 체포 사건 배후로 의심 받아…“남미 통합 방해하려는 공작”
 
거물급 게릴라 체포 사건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사이에 외교 분쟁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사이가 나빴던 두 나라 관계는 이번 사건으로 20년 만에 최악으로 벌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번 사건의 파문이 남미 전역을 물론 미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의 ‘외무부 장관’으로 통하는 로드리고 그란다가 체포된 것이 발단이었다. 그란다는 무장혁명군의 거물급 지도자인데, 베네수엘라에 체류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비호 아래 친 차베스 운동을 벌여왔다. 그란다는 미국이 작성한 국제 테러리스트 명단에도 올라 있다.

워낙 거물급이 붙잡혀 체포 경위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나는 현상금 사냥설. 콜롬비아 정부가 내건 현상금을 노리고 베네수엘라 경비대가 납치했다는 것이다. 베네수엘라 경비대가 그란다를 납치해 차에 태운 뒤 콜롬비아 국경 도시 쿠쿠아에서 ‘현상금’을 넘겨 받고, 콜롬비아 당국에 신병을 인도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또 하나는 베네수엘라 경찰의 도움을 받아 콜롬비아 특공대가 체포했다는 설이다. 양국 정부 사이에 오가는 발언 내용을 놓고 보면 현상금 사냥설이 더 유력하다.

그란다 체포는 한동안 비밀에 붙여졌다. 그가 체포된 사실이 알려져 양국간 외교 분쟁으로 비화한 것은 지난 1월 중순이었다.

콜롬비아 경찰청장은 그란다가 체포된 지 사흘 후에, 그를 체포한 사실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란다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붙잡힌 사실은 숨기고 ‘국경 도시 쿠쿠다에서 체포되었다’고만 발표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국방장관 호르헤 알베르토 우리베가 그란다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지불했다고 밝히면서 양국 분쟁에 불이 붙은 것이다.

 
베네수엘라·콜롬비아 외교 분쟁 가열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자국의 주권이 침해되었을 뿐 아니라, 콜롬비아가 자국 관리까지 매수했다며 콜롬비아 정부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콜롬비아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는 한편, 양국이 추진하던 대형 프로젝트, 예를 들면 송유관 설치 사업 등의 전면 중단과 교역 축소를 들먹였다.

알바로 우리베 콜롬비아 대통령도 가만 있지 않았다. ‘차베스 정부가 게릴라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라며 콜롬비아 정부는 베네수엘라가 원한다면 증거를 댈 수 있다고 반격에 나섰다.

논란은 우선 ‘현상금’의 성격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한다. 콜롬비아는 현상금이라고 표현하지만, 베네수엘라는 이를 ‘매수 자금’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내면적 변수는 바로 미국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처럼, 평소부터 차베스 정부에 감정이 좋지 않았던 미국은 콜롬비아를 응원하고 나섰다. 이에 베네수엘라 국민총회 니콜라스 마주로 의장은 지난 1월22일, 이번 사건을 아예 ‘차베스 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한 부시 정부의 반 차베스 캠페인’이라고 규정했다. ‘수억 달러를 들여 차베스 정부의 국제 고립을 부채질하고 남미 통합을 방해하려고 꾸민 공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1월25일 정부를 지지하는 군중 대회에 직접 나와 “미국은 세계의 주인인 양 행세하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무시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차베스는 또 “그란다 사건은 미국이 계획한 도발이다. 나는 여기서, 부시는 백악관에서, 과연 누가 더 오래 견딜까를 점치는 내기에 1달러를 걸겠다”라고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을 조롱했다.

차베스 대통령의 화살이 조지 부시 대통령만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미국의 신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도 과녁으로 삼았다. 라이스 장관이 지난 날 차베스 정부를 두고 ‘피델 카스트로의 전제를 포용하는 라틴 국가의 부정적 세력’이라고 폄하했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그녀에 대해 ‘세계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라틴 국가에 대해 까막눈인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미국, 베네수엘라 집중 공격

게릴라 지도자 체포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남미의 이웃 국가들은 불끄기에 나섰다. 브라질의 집권 노동당 총재 호세 헤노이노는 인테넷 홈페이지를 통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분쟁은 지역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또한 콜롬비아·베네수엘라 양국 정상과 직접 통화하고, 외무장관과 정책 자문 등을 양국에 보내 중재에 나섰다. 칠레·아르헨티나 등 다른 국가 정상들도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며 중재 노력에 합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노골적으로 베네수엘라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지난 1월26일 남미 각국에,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에 비타협적 자세를 촉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보다 이틀 전에는, 차베스 대통령에게 베네수엘라에 있는 테러리스트 10명에 대한 체포도 요구했다. 물론,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이같은 미국의 움직임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안데스 공동체’(볼리비아·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베네수엘라) 사무총장 알렌 워그너(페루)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를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의 우려를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들 일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남미 각국이 유럽연합을 본뜬 남미연합을 결성하겠다고 본격적으로 나선 마당에 터져 나온 콜롬비아 반군 게릴라 지도자 체포 사건에 남미 각국은 당황하고 있다. 이 사건이 남미의 분열을 가져와 남미연합 구상에 악영향을 주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남미 각국이 콜롬비아·베네수엘라 외교 분쟁을 원만하게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팔을 걷어붙이는 한편, 미국을 곱지 않은 눈길로 흘겨보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최근 콜롬비아 주간지 <세마나(Semana) designtimesp=8873>는 지난해 체포된 그란다의 수첩에서, 콜롬비아 반군 지도자들과 베네수엘라 고위 관리 등 주요 인사들 이름과 연락처가 무더기로 나왔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볼리비아의 한 국회의원은 이를 ‘미국에서 흘러나온 모략’이라고 일축했다. 미국이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남미에서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의 베네수엘라·콜롬비아 외교 분쟁 사태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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