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시작되었다”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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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여배우 전성 시대…탄탄한 연기력 뽐내
스타란 이렇게 쓰는 것.’ 영화 <스캔들>에 대한 한 평론가의 촌평이다. 추석 대목을 넘기고 개봉했으면서도 개봉 첫 주 전국 관객 100만 명을 돌파한 <스캔들>은 개봉 11일 만에 2백만명을 가뿐히 넘어서 대박을 예고하고 있다.

작품의 초반 흥행은 마케팅의 힘이다. 그리고 뚜껑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마케팅은 상당 부분 ‘스타’의 이름값에 의존한다. 이미숙과 전도연 그리고 배용준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캐스팅은 선점 효과를 누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첫 끗발’에 그쳤을 것이다. 배우들은 관객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이미숙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는 발군이다. “마음은 권도령에게, 몸은 조 원에게 가 있으면서 시집은 유대감에게 온다?” 협박하듯 어르듯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대사들을 이미숙이 아닌 다른 여배우가 어찌 소화할 수 있으랴.

전도연의 받쳐주는 연기도 일품이다. <스캔들>은 사실 이미숙이 맡은 조씨 부인 역에 무게 추가 기울어져 있어 톱클라스인 전도연이 나선 것은 ‘결단’으로 비친다. 제작 영화사인 ‘봄’의 이유진 프로듀서에 따르면, 전도연을 모시기 위해 작품을 조금 손질했는데, 그녀가 맡은 숙부인 역할이 커지면서 작품의 긴장감이 더 높아지는 효과를 얻었다.

데뷔 10년차 이상으로서 요즘 내공을 발하는 여배우는 이들뿐이 아니다. 브라운관에서도 전례 없는 30대 배우 전성 시대가 열렸다.
대표 주자는 문화방송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 이영애다. 이 작품은 장금의 맞수인 금영 역까지 윗 연배인 홍리나가 맡았다. 그간의 관행으로 보면 10대 후반부터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 10년차 이상 여배우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 제작진은 “규모가 큰 드라마는 안정감 있는 연기가 뒷받침되는 스타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이들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 밖에 눈에 띄는 중량급 배우로는 김수현의 새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주연을 맡은 김희애를 꼽을 수 있다.

여배우가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0년 연상인 배역을 맡는 관례가 가장 극적으로 깨진 경우는 문화방송의 주말극 <회전목마>다. <인어공주>로 효녀 노릇을 톡톡히 했던 30대 여배우 장서희가 여고생 역부터 맡기 시작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런 추세보다 더욱 반가운 점은, 극중 캐릭터가 관록 있는 여배우를 호출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노처녀, 연상의 바람녀 등 예전 같으면 조연 내지는 악역에 머물렀을 여성들이 발언권을 가진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추세와 궤를 같이 한다.

<접속>이나 <해피 엔드> 없이 지금의 전도연이 가능했을까? <정사> 없이 이미숙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이 가능했을까? 공교롭게도 이런 작품들 뒤에는 세상의 변화를, 여성의 갑갑증을 발 빠르게 간파해낸 여성 기획자들이 버티고 있다. 명필름의 심재명과, 그곳에 유난히 많은 여성 프로듀서들은 <접속>과 <해피 엔드> 그리고 <바람난 가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완성했다. 역시 여성인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가 여성 프로듀서를 오른팔로 두고 있는 것도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다. 봄은 <정사>에서 재발견한 이미숙의 매력을 <스캔들>에서 한껏 개화시켰다.
새로 개봉하는 영화 <아카시아>는 심혜진이 5년 만에 출연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녀는 부산영화제에서 “나 같은 중고도 쓰겠다고 해 반가웠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날렸는데, 연출을 맡은 박기형 감독의 답변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심혜진이라는 배우를 쓸 수 있는 기획이어서 더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았을 때부터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라고 고백했다.

쏟아지는 영화에 여배우를 조달하느라 바쁜 영화계 사람들은 의외로 20대 여배우 가운데 스크린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말한다. 한국 영화는 여배우의 몸값이 대체로 높다. 그만큼 여배우의 관객 동원력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데, 의외로 20대 여배우 가운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는 전지현 정도가 꼽힌다. 최근 <싱글즈>로 장진영이 이 대열에 합류한 것이 고작이다. 그러니 30대 여배우의 활약 이면에는 그들이 잘한 덕도 있으나 아랫 세대가 못한 탓도 있는 셈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떠나간 심은하를 오매불망 그리는 것도 그 빈자리를 메울 배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사 마술피리 마케팅실장 정금자씨는 “매니지먼트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배우들이 폭발력이 덜한 연기보다는 가수, 혹은 정체가 불분명한 엔터테이너로 포장하는 경우가 늘어 연기자 씨가 마르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이런 현상을 가장 절감하는 곳은 방송사. 최근 세 방송사는 탤런트 공채 광고를 내면서 미니 시리즈나 주말극 등 굵직한 드라마에 직투입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미 배우 수급 체계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절박함이 읽히는 대목이다.

30대 여배우들에게는 행운도 따랐다. 광고 상품 다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화장품 광고가 거의 유일한 광맥이던 시대에 꽃미녀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은, 미시 세대를 겨냥한 고급 가전과 카드 상품, 자동차, 아파트 상품이 새로이 광고 시장에 편입되면서 광고 모델로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상품들은 20대 여성의 싱그러움보다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이미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욕조에 몸을 담그고 한강 야경을 감상하는 이영애, 고급스런 가전 제품과 가구 광고는 도맡아 하는 채시라와 김남주, 그리고 고소영이 그 주인공들이다. 올해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미연은 뒤늦게 광고 모델로 각광받고 있다. 당당하고 쿨한 이혼 이후 그녀의 주가는 더욱 뛰었고, 최근에는 광고주협회로부터 최고의 광고 모델에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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