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남자''들이 뜬다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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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서 사랑받고 재롱피워 인기 얻고 드라마 속 요즘 남자들, 이래서 여성들이 좋아한다
최근 40대 후반인 한 남성은 아들과 함께 드라마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들은 말했다. “나, 저런 아빠 좋아. 저런 아빠 될 거야.” SBS에서 방영되는 김수현의 드라마 <완전한 사랑>이 사단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아이들은 차인표가 보여주는 ‘새로운 아빠’상을 단박에 알아채고 환호한 것이다.

말로만 자상한 아빠가 아니다. 그는 아이들과 국수를 끓여 먹을 줄 알고, 만화책을 보며 함께 낄낄댄다. 고추를 덜렁거리는 아들놈에게 비누 목욕을 시킬 수 있는 ‘스킬’도 갖추고 있다. 아내에게는? 한없이 재롱을 피운다. 잠옷을 입다 말고 ‘거시기’가 잘 있는지 점검하고, 말문이 막히면 방귀를 뿡뿡 뀐다.

그의 매력은 또 있다. 이 대목에서는 극중 인물 ‘시우’가 아니라 배우 차인표가 나선다. 차인표는 대체 왜 그렇게 옷을 훌렁훌렁 자주 벗는 것인지. 덕분에 그는 비록 파자마 바람이지만, 잘 발달된 근육질 몸매를 틈틈이 과시한다. 바람머리가 그럴듯한 박시우에게 작가 김수현씨는 “내가 안정환보다 먼저야”라는 대사를 주어 시청자들에게 장난을 건다. 그 대사를 들으며 여성 시청자들은 둘을 견준다. ‘그렇군. 그런데 안정환과 차인표, 누가 더 섹시한 거지?’

“폼 잡는 마초는 싫다”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설정 아닌가? 남성에 대한 판타지의 최신 버전인 ‘재롱피우는, 예쁜’ 남편 시우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뒤집은 것이다. 반면 아내는 똑부러지고 당당하다.
여러 모로 <완전한 사랑>과 비교되곤 하는 송지나씨의 새 드라마 <로즈마리>(KBS)에서도 귀여운 남편의 이미지는 재생산된다. 김승우는 퉁퉁 부은 표정으로 말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 들어온 남편을 혼자 재우다니, 넌 나쁜 마누라야, 씨이.”

드라마 속 남성들이 변하고 있다. ‘우수 어린 얼굴로 폼 잡는 주인공은 가라.’ 요즘 남자 주인공들은 죄다 귀염둥이거나 양아치다. 구애에 나서는 남성들의 무기는 유머 수준이 아니라 숫제 재롱이다. 듬직하고 매너 좋은 남자들은 재롱 피우는 양아치들에게 줄줄이 물을 먹는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는 ‘쌩’ 양아치 양동근이 언니의 낙점을 받았고, <옥탑방 고양이>에서도 귀여운 양아치 김래원이 마지막에 웃었다. 한때 언니들의 귀여움을 받았던 꽃미남들도 분위기만 잡아서는 살아 남지 못한다. 생존 조건 1위는 미모가 아닌 재롱이다. 또 하나. 그들의 양아치성은 진부해진 주류 질서에 무작정 편입하지 않는 반항아 기질로 세팅된다. 최근 종영한 <상두야 학교 가자>에서 가수 비는 귀여운 양아치의 최신 버전이다.
연애 상대가 아니라 결혼이라면? <완전한 사랑>이나 <로즈마리>에 앞서 모범 답안을 내보려고 애쓴 드라마가 있다. MBC 주말극 <맹가네 전성시대>다. 아쉽게도 저조한 시청률에 밀려 조용히 막을 내렸지만, 여성들이 어떤 배우자를 원하는가에 대한 보기 드문 탐구 정신을 보여주었다. 애 딸린 이혼녀이자 약사인 채시라는, 조건 좋은 변호사의 구애를 물리친다. 대신 음식 잘 하고 아이를 잘 돌보며 무엇보다 말이 통하는 이재용을 배우자로 낙점한다.

기존 잣대로 볼 때 이재용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양아치다. 변호사는 허둥댄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는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요리도 배워보고 장난감도 조립해보지만, 시늉으로는 어림도 없다. 앞에 등장하는 드라마의 작가는 모두 여성이다. 총각이건 유부남이건 판타지에 일관성이 있다. 저 귀여운 양아치 총각들이 결혼하면 저런 남편이 되지 않을까, 한 두름에 엮인다.

반면 ‘페미(페미니스트) 오빠’들의 작업은 약간 다른 갈래를 보여준다. 오빠들이 만든 언니들을 위한 영화인 <처녀들의 저녁 식사>나 <싱글즈>에는 마초가 아닌 착한 남자들이 여럿 나온다. 이들은 언니들과 친구처럼 교유한다. 하지만 이들의 자리는 어정쩡하다. 기 센 언니들의 수다에 장단을 맞춰주거나 설혹 구박을 받더라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잠자코 받아주는 것이 고작이다. 이들은 ‘어떤 남성’의 모델이라기보다는 ‘마초가 아닌 남자’라는 소극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마초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디냐는 태도다.

그러니 남성이 생각하는 괜찮은 남자란 기껏해야 ‘선한 가부장’이다. 김운경의 주말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의 재섭이 대표적인 예다. 주인공 재섭은 내가 모두 감당하겠다는 한없는 너그러움을 보인다. 왜? 남자이니까.

착한 가부장에 대한 향수도

물론 시절이 어려워지면서 ‘선한 가부장’에 대한 그리움도 다시 지펴지는 기색이다. 꽃미남 대신 ‘턱미남’이라는 말이 새로 등장한 것이 그 예다. <다모>에서 인기를 모은 터프남 김민준이나 <회전목마>의 부잣집 아들 김남진을 일컫는 말이다. 두 사람은 곱상한 미모보다는 남성적인 매력과 포용력이 돋보인다. 인상 전문가들은 남성의 각진 턱이 그 원인이며, 각진 턱은 신뢰감이나 책임감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고 풀이한다.

문화 평론가 양은경 교수(충남대·언론학)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고정된 성 역할로 회귀하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성 역할이 고정 불변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라는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에 과거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러고 보니 <완전한 사랑>의 차인표에게는 또 하나의 매력이 있다. 부당한 시댁의 요구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자기가 단호히 맞섬으로써 아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가만, 차인표의 얼굴을 보자. 그도 턱미남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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