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통일 염원 시집 ,남과 북. 낸 고 은 시인
  • 경기도 안성·李文宰 편집위원 ()
  • 승인 2000.02.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 은 시인, 하버드·버클리 대학에서 1년간 한국시 강의하고 귀국… 통일 염원 시집 <남과 북> 펴내
당초에는 안식년 같은 시간을 기대했다. 지난해 1월 말,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초빙되어 미국 땅을 밟았을 때, 고 은 시인의 삶과 정신은 산속의 호수와 같은 맑은 적막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출가와 환속,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극단적 허무주의, 그리고 70년대 이후 시대의 전위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던 실천적 지식인으로 살아오기까지, 그야말로 질풍 노도였던 삶과 문학을 괄호 안에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한국시를 강의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해 왔다. 결국 그의 미국 체류 1년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분주한 나날이었다. 미국 동부 하버드 대학에서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로, 뉴욕·시카고·하와이와 캐나다 요크 대학, 멕시코 등지를 오가며 한국 시를 가르치고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남과 북에서 함께 읽는 시였으면”

지난해 말 귀국 길에는 이집트·터키·그리스를 둘러보았다. 그 두 달 동안, 폐허 안에서 폐허를 명상했다. 고대 문명들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어 보편의 씨앗이 되었지만, 현재 그 발상지는 폐허 그 자체였다. 고대 문명의 폐허에서 그는 그동안 알지 못하고 지내왔던 육친과 상봉했다. “나는 폐허 세대다.” 그는 6·25 때 고향 항구(군산)가 폭격으로 폐허가 되는 광경을 목격한 이래, 종전 직후 전쟁의 잔해로 그득했던 서울 거리를 거쳐, 1970∼1980년대 민주화의 불모지대를 가로질러 오는 동안 줄곧 폐허와 더불어 살아 왔다.

그가 1년 동안 고국을 비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그는 매순간 시인이었다. 시를 강의했고, 시를 낭송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에서 시를 썼다. 지난해 7월 한 달 동안, 무려 1백34 편에 달하는 시를 써 내려갔다. 꿈속에서 구상한 시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매우 오랜만에 찾아온 신들린 듯한 집중이고 전념이었다. 2월20일께 서점에 진열될 전작 시집 <남과 북>(창작과비평사 펴냄)은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남과 북>은 1998년 여름, 보름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현지에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감회의 여운이다. “현재 상황에서 남북체제를 아우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금만 비켜서기로 한다면, 남북이 함께 살아온 장구한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질감이 아니라 동질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고 은 시인은 말했다.

<저녁>을 서시로 앞세우고 있는 이번 시집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만인보>를 연상시킨다. <만인보>에서 확대된 눈으로 남북의 역사와 풍경을 아우른 ‘국토시편’이다. 그리하여 <남과 북>에 담긴 언어들은 종횡무진이다. 개마고원을 누비는가 하면 마라도로 건너가고, 부벽루 현판 앞에서 멈추어 섰다가 광화문을 배회한다. 휴전선만 넘나드는 것이 아니다. 단군, 고주몽, 여진의 처녀들, 사명대사, 김시습, 개마고원 항일 빨치산, 황해도의 사과꽃 따는 아낙네들과 시공을 뛰어넘어 거침없는 대화를 나눈다.

고 은 시인은, 그가 1970∼1980년대에 외쳤던 ‘서슬 푸른 즉각 통일론’에서 멀어져 있다. 오히려 통일에 대한 ‘비전투적 잠복기’가 길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민주화와 분단 극복은 구호의 시기를 벗어나 ‘단계로서의 인식과 실천의 일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북상하는 봄꽃 소식과 남하하는 단풍 전선 앞에서 ‘어머/어머 소스라쳐 기뻐’하거나 ‘단풍 가면/아이고 어쩌나 안타까워하다가//한밤중 북극성 하나 바라보면/거기 내일이 있’다는 것이다(시 <단풍> 중에서). 신념이나 이론보다 정서적인 동질성 회복, 즉 일상적 실천을 통해 ‘북극성과 내일’로 상징되는 통일에 대한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시인이 ‘남과 북의 독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시’이기를 바라마지 않는 시집 <남과 북>은 바로 이 지점에 놓인다.

단기간에 각혈하듯 쓰인 시들이어서 그런지, 간혹 정련이 덜 된 듯한 대목이 없지 않지만 <사과꽃 따는 여자들>이나 <삼수> <언 감자국수>와 같은 시편들은 분단 이후 남쪽 시인에 의해 쓰인 최초의 빼어난 ‘북방 정서’라는 의미 하나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당당하다. 백석으로 대표되는 북방 정서와 오늘의 남쪽 독자들 사이에는 50년 이상의 시차가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남과 북>이 쓰이던 지난해 7월 이전, 그는 버클리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한국학 전공 대학원생들에게 한국 시를 강의했다. 그는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선언했다. “시는 시집이나 평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여러분의 심장 속에 있다. 시는 시학이 죽였다. 시는 심장의 뉴스다!” 파격이었다. 아연실색하던 학생들은 곧 환호했다. 이후 강의실은 혼연일체였다. 강의를 끝내고 나면, 고 은 시인은 맛있는 술을 마신 듯 가뿐했다. 하버드 강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 시 그 자체보다, 한국시와 한국 문화를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시는 노래이며, 심장의 뉴스다!”

미국 시의 현장을 함께 호흡해 보았다는 체험도 각별했다. 도미 직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시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전역을 돌아보면서 미국만큼 시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서 매일 밤 시낭송회가 열리고, 시낭송회마다 최소 50명에서 5백 명에 이르는 청중이 몰려들었다.

그의 시낭송은 대성공이었다. 그의 포효하는 듯한 한국어 시낭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청중이 있는가 하면, 전공을 바꾸어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외국 학생들도 있었다. 시는 노래이며 시인은 음유 시인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미국과 멕시코 등지에서 새삼 절감한 것이다.

1년 동안 비어 있던 안성 자택으로 돌아온 그는, 오후가 되면 혼자 들판으로 산책을 나선다. 봄을 기다리는 텅 빈 벌판의 입구에서 그는 “들 한복판보다는 들의 구석을 가꿔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목소리 크게 살아왔는데, 이젠 목소리를 줄이고 싶다. 시인은 시인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큰 시인의 빈 마음이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