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수배된 문학 평론가 조정환, 사회 복귀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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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된 문학 평론가 조정환씨, “사회 복귀” 의사 표명
진보 문학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으로서 문단의 한 축을 담당했던 문학 평론가 조정환씨(43)가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실종 소문이 나리만큼 철저하게 몸을 숨기고 살아온 그가, 수배 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시사저널>을 통한 그의 공개적인 의사 표명은, 시대와 사회 환경이 바뀐 만큼 이제는 떳떳한 생활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박한 심경 표현이다.

조씨가 10년 동안 몸을 숨겨온 까닭은, 90년대 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사노맹) 사건 때문이다. 당시 월간 <노동해방문학>(노해문)의 주간 겸 편집위원을 맡았던 그는, 90년 12월 ‘사노맹 간부’로 간주되어 공개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공개 수배는 그에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먼저,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노해문>을 사노맹의 기관지로 지목하고 관련자를 수배·구속했다. 그러나 <노해문>은 사노맹 기관지가 아니었을 뿐더러, 사노맹이라는 조직과도 직접 관련을 맺고 있지 않았다.

조씨에 따르면, <노해문>은 89년 4월 ‘문학이 사회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뜻을 모은 문인들이 힘을 모아 창간한 진보적인 문예지이다. 창간 당시 김사인씨(문학 평론가)가 발행인 겸 편집위원, 조정환씨가 주간 겸 편집위원을 맡았고, 시인 백무산·정인화, 문학 평론가 정남영·임규찬·임홍배 씨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사노맹 간부’로 몰린 뒤 잠행

<노해문>이 사노맹 기관지로 낙인 찍힌 가장 큰 이유는, 창간호부터 필자로 참여한 사노맹 관련자들 때문이었다.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씨와 박씨의 부인 김진주씨, 사노맹 중앙위원장 백태웅씨 들이 매호 장문의 글을 기고한 필자였다.

“잡지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원고를 모으는 것이다. 백태웅·김진주 씨는 투고를 해왔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박노해씨와는 철저히 문학적 관계로 만났을 뿐이다”라고 조씨는 말했다. <노해문>은 박노해·백태웅 씨가 사노맹 중앙위원임이 밝혀지면서 이적 표현물로 규정되어 통권 6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사인·임규찬 씨가 구속되었고, 나머지 편집위원들도 수배되었다.

안기부는 <노해문> 주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노맹 간부’라는 모호한 직함을 그에게 붙여 90년 12월 현상금 5백만원을 걸고 공개 수배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90년 10월 <노해문>에 주간 및 편집위원 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유서를 제출하고 자진 사퇴한 상태였다.

조씨는 왜 자기에게 ‘사노맹 간부’라는 모호한 직함이 붙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노해문>에서 박노해·백태웅 씨 다음으로 글을 많이 썼기 때문인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는 80년대 말 변화한 시대 상황에서 문예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노동해방문학론’을 내세우며 치열한 문학 논쟁을 벌이고 있던 터였다. <노해문> 창간은 그에게 이론적 차원에서 주장·논의되었던 노동해방문학론의 정당성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박노해·백무산 씨는 그의 리얼리즘론을 창작으로 뒷받침해 주는 노동자 시인이었다.

안기부가 공개 수배할 당시 그가 가장 당혹스러워하고 억울해 한 것은, 변호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사노맹 간부라는 멍에가 덧씌워졌다는 사실이다.

그가 멍에를 풀기 위해 선뜻 나서지 못했던 것은, <노해문>과 함께했던 문예운동 조직 ‘노동해방문학실’ 관계자와 박노해·백태웅 씨를 비롯한 사노맹 관련자에 대한 중형 선고 때문이었다. 박노해씨가 무기 징역을 선고 받았고, 백태웅씨도 십수 년 실형을 선고 받았다. “옛 동료들은 대부분 구속되어 형을 살고, 또 일부는 수배된 채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어느 누가 나의 말을 믿어 줄지 의심스러웠다. 십중팔구 나도 중형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체포·구속의 공포는 조씨에게 특별한 것이었다. 80년대 초 서울대 인문대 대학원생들끼리 만든 ‘스터디 그룹’이 87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던 그는, 몇 달 만에 늑막염 결핵을 얻어 병 보석으로 풀려난 적이 있었다. 서울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시간 강사를 하던 그에게는 안기부의 조작으로 구속된 것도 억울한 일이었지만, 조사 받을 때 당한 구타와 고문에 대한 공포가 더욱 가슴을 짓눌렀다. ‘또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온다’는 강박이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조정환이 실종되었다’고 문단 안팎에 소문이 파다하리만큼 고립과 단절의 10년이었다.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는 딸을 출산했고, 장인·장모와 숙부는 그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조씨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청와대에 선처 호소하는 탄원서 제출

수배는 ‘창살 없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성도 이름도 없이 자립성을 상실한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방 한 칸 얻는 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으며, 밤마다 경찰에 쫓기고 체포되는 악몽에 시달렸다.

인신 구속에 대한 불안감과 돈 문제도 그를 괴롭혔으나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80년대 비평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라는 내용의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굴욕감이었다. “정리된 생각을 발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라고 그는 말했다.

조씨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할 때부터 사면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 또한 컸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관심은 온통 구속자에게 쏠려 있을 뿐 수배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가 ‘이제는 세상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전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그를 실종자로 규정하고 방송하려 할 때부터였다. “나에게 그 소식이 왔을 때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 틀림없이 사진이 나갈 터인데, 그것은 다시 한번 공개 수배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박노해·백태웅 씨를 비롯한 사노맹 관련자들이 모두 사면·복권되었고(백태웅씨는 8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더군다나 재판부가 <노해문>이 사노맹의 기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확인해 주었다. 옛 친구와 동료를 하나 둘 만났는데 한결같이 ‘이번에는 꼭 정리해야 한다’는 반응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상이 변하면서 그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노해문> 당시에 가졌던 생각 가운데 핵심적인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암묵적 지지였다. 이후의 현실을 보건대 일정한 오판이었다고 생각한다. 미학적 차원에서도 문학을 노동 해방 운동의 수단으로 사고했던 것이 문학을 살찌우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세상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이유 가운데에는 어느새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딸에 대한 ‘원죄 의식’도 있다. 결핵에 걸려 2년 넘게 치료를 받고 있는 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가 유학 갔다’고 굳게 믿었던 딸에 대한 죄 의식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불 같은 시대’였던 80년대는 국문학자로서 문학 평론가로서 황금기를 누려야 할 한 사람의 30대를 앗아가 버렸다. “수배자 문제가 비단 나 한 사람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 광복절에는 조사를 받든 사면을 받든 어떤 형태로든 이 문제를 풀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사면을 받아 학위 논문을 쓰고 문학 평론을 하는 자기 자리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청와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그리고 백낙청·박희병·허남진 교수 등 그를 아끼던 서울대 인문대 교수들 또한 조정환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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