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문화재 보호 제도 민족의 얼 훼손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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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정책 공청회 지상 중계
“인간문화재라는 말을 쓰지 말자. 생계보조비는 법적인 근거가 없는 지출이다. (무형문화재분과) 문화재 위원을 전면 교체하라.” 1월22일 열린 중요무형문화재 정책에 관한 공청회(전통문화정책포럼 주최)에서는 과격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십년 동안 전통 문화 전승에 몸을 바친 이들이라면 발끈할 만한 내용이다(87쪽 상자 기사 참조).

이 날 공청회에서 소장 학자들이 문제 삼은 대목은, 무형문화재 제도가 오히려 고유 문화 전승에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지원 제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내실을 기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성인 셈이다. 현재 무형문화재에 대한 지원 정책을 펴는 나라는 한국·일본 등 다섯 곳에 불과하다.

문화재 정책 망치는 관료와 전문가 ‘짬짜미’

이 날 포럼은 내부자 고발이나 다름없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장 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알면서도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이렇게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는 이유는, 그나마 우리가 그 먹이 사슬에 편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완곡한 세대 교체론인 셈이다.

우선 무형문화재 정책의 걸림돌로 관료와 전문가의 짬짜미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민속학자 주강현씨는 “관료와 전문가 집단 간에 적절한 긴장이 없었다”라고 지적하고, 그 이유로 특정 전문가 집단의 ‘장기 집권’을 꼽았다. 주씨는“무형문화재분과의 경우 30년 이상 재위촉된 사례가 있으며, 그 인물을 중심으로 사단을 방불케 하는 권력 집단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문화재 위원들이 수뢰 사건에 휘말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이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주씨에 따르면 지방과 중앙의 문화재 위원을 겸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겸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지역 문화재 위원이 작성한 보고서가 주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자리를 겸임할 경우, 본인이 제안하여 본인이 결정하는 꼴이 된다. 문화재관리국의 문화재 위원 담당자는 “그 지역에 적합한 인물이 없을 경우 중앙 전문가가 지역 위원까지 겸하는 경우가 있다. 구조적인 문제가 예상되지만, 겸임할 수 없다는 조항이 없기 때문에 규제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양식에 맡겨진 사안이, 상식적으로도 납득하기 어렵게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경연대회)도 도마에 올랐다. 그동안 경연대회는 화려하게 각색한 작품이 상을 받는 사례가 많아 전통 문화를 왜곡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지난해 경연대회 평가단으로 활동한 주강현씨에 따르면 제작비가 8억원에 이르는 철골 구조물을 동원한 출품작도 있었다. 이필영 교수(한남대·한국사)도 경연대회 때문에 공동체 문화가 전시형 이벤트로 왜곡되는 실태를 지적했다. “당제가 풍어당굿놀이가 되고, 길쌈이 길쌈놀이가 된다. 심지어 빈상여도 아닌데 상여놀이가 되어 버린다.”

문제는 이렇게 상을 받은 작품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예가 많다는 것이다. 현재 경연대회 수상작 가운데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예는 총 35건(지방문화재는 53건)에 달한다. 이러다 보니 지방자치단체가 앞장서서 변형을 부추긴다. 이필영 교수는 지역에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당혹스러움을 털어놓았다. “그 민속이 의미가 있다고 해도 출품 과정에서 덧붙여지고 왜곡되었다면 본디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심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신청하면서 오히려 경연대회 팜플렛을 함께 제출한다. 심지어 지방자치단체가 압력을 넣기도 한다.” 이교수는 경연대회 성격을 바꾸고, 이를 통해 문화재로 지정받은 민속을 재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재 조사에서 지정까지 총체적 부실

문화재로 지정됨으로써 공동체 문화를 해치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하는 바람에 마을 사람 간의 갈등이 불거지는 것이다. 공청회 소식이 알려지자 주최측에 비슷한 문제를 호소하는 문건이 접수되기도 했다. 60년대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ㄱ종목의 경우 행사를 치르는 데 1백40여 명 정도가 참여하는데 그 중 3명만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는 바람에 주민들 간에 위화감이 생겼다.

물론 이를 슬기롭게 해결한 사례도 있다. 보유자가 전승지원금을 보존회에 내놓아 전수 경비로 쓰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 민속의 경우 개인을 지정하지 않고 종목과 단체만을 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처방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 과정도 손질할 구석이 많은 것으로 꼽혔다. 우선 당일 심사로는 마을의 습속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심지어 언변 좋고 상품성이 돋보이는 사람에게 노래와 춤을 익히도록 해서 신청하는 사례도 있는데, 마을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속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지역 문화에 정통한 향토 민속학자를 참여시키고, 조사 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전문가들 간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베틀짜기를 심사할 때 민요 전문가는 노래에만 신경을 쓰고, 복식 전문가는 옷감의 구성에만 관심을 두게 마련이어서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 의견을 참고했는지 의심스러운 문화재도 많다고 한다. 마을의 동제는 상·하 당신에 대한 제례인 만큼 짝을 이루는 예가 많은데 하나만 따로 떼내어 지정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따로 지정한 것은 고전적인 실책으로 꼽혔다. 한국종교연구회 진철승 연구위원은 불교 의식 가운데 최고의 공양법인 영산재(靈山齋)를 4개 분야로 나누어 문화재로 지정한 것을 예로 들었다.

당국의 감사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높았다. 일부 상품성이 있는 종목의 경우 기능 보유자들이 본인의 상품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전수를 꺼린다는 말이 전수자들 입을 통해 나오는 실정이지만, 변변한 교육 실태 보고 체계조차 없다. 의무적으로 1년에 한번씩 발표회를 갖도록 했으나 올해부터는 강제성이 없어진다. 94년부터는 이수증 교부 권한을 보유자에게 넘겼다. 보유자에게 자율권을 주겠다는 뜻이지만, 문제는 권리에 따르는 의무를 강제할 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날 포럼측이 ‘인간문화재·생계비라는 용어를 쓰지 말자’고 야박하게 물고늘어진 배경에는, 그런 용어가 전승 의무보다는 권리만 주장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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