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박기형 감독 <비밀>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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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 소녀와 30대 이혼남의 교감 그려
‘이상한 소녀를 만났다.’ 영화 <비밀>은 이렇게 말한다. 관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상한 영화를 만났다.’ <여고괴담>으로 화제를 모았던 박기형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비밀>은, 상업 영화치고는 매우 느리고 어둡다. 얼개는 초능력 소녀와 30대 남자의 만남. ‘초현실 감성 영화’라는 몽롱한 포장과 달리 메시지는 명료하다. 주적은 이중적인 도덕률. 위선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위선이 낳은 묵시록적인 풍경을 들이민다.

구호(김승우) 일행은 취한 채 운전하다 차 앞에 뛰어드는 미조를 미처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낸다. 공중에 붕 뜰 정도로 충격이 컸지만 소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다. 그의 비밀을 풀어 가던 구호는, 미조가 세상의 부패를 대속하려는 듯 ‘자신의 근원(부모)’을 지운 뒤 자살하려 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미조는 어느 순간부터 물을 움직이는 초능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힘은 어느 순간 파괴력으로 바뀐다. 사람 몸안의 물까지 끌어당겨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소녀는 순수한 구호와 교감하면서 정신적 외상을 치료받다가, 구호가 그 감정을 부인하자 초능력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둘이 교감하는 원천은 남다른 정신적 외상이고 그것은 주변의 위선적인 도덕률에서 말미암는다. 구호의 친구 현남은 편의적인 도덕률을 보여주는 사례. 분방한 연애를 즐기면서도 “나는 적어도 결혼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라고 합리화한다. 반면 구호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혼하는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해온 아내가 “당신은 내게 편한 존재였을 뿐,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라고 말하자 선선히 보내준 것도 그 때문이다. 미조의 외상은, 더 깊고 근원적이다. 그를 존속 살해로 이끈 것은, 도덕적 불감증에서 말미암은 ‘어떤 사건’이다.

판타지의 틀 속에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것은, 이제 박기형 감독의 스타일로 자리매김된 듯하다. 그는 “영화는 꿈이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꿈이 아니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박감독은 “전작과 달리 응징해야 할 악이 선명하지 않아 대중 영화로는 다소 부적절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한 예로 미조의 힘을 흩어지게 하는 이유가, 구호가 사회의 시선에 밀려 자신의 감정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설정에는 개인이(특히 성인이) 사회의 도덕률로부터 자유롭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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