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역사는 말한다 "간도는 우리 땅"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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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간도 땅 반환 국제 소송 준비해야”중국측은 학자 동원해 자기 영토 굳히기
새천년 맞이로 전국이 들떠 있을 무렵인 지난해 연말, 국민들은 해묵은 문제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의 소동을 치러야 했다. 일본이 또 기습적으로 독도 문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종래처럼 영유권 주장을 되풀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발생한 사태는 일본이 보여주었던 과거의 어느 행태보다 훨씬 더 고약했다.

일본은 ‘말로만’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신, 이번에는 아예 ‘독도를 소속 행정 구역으로 갖고 있다’는 시마네(島根)현의 한 주민으로 하여금 독도를 주소지로 하여 호적을 만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종래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도가 자기네 행정 구역임을 기정 사실화하려는 노력을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이같은 행태에 대해 ‘장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국제법 분쟁에서 유리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명분 쌓기용’이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국민은 일본의 ‘말도 안되는 소행’을 성토하느라 새해 벽두부터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비록 많은 국민이 ‘이대로 가다가는 독도가 아예 일본에 먹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이같은 우려에 설득력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영유권 주장에 관한 한 독도 문제는 당장 큰일 날 성질은 아니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명백한 ‘한반도의 부속 도서’로서 대한민국 영토에 귀속되어 있고, 정부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도를 지키고 일본의 ‘허튼 수작’을 감시하려는 국민의 눈길은 매섭기만 하다.1712년 백두산 정계비가 문제의 발단

하지만 눈길을 한반도 북쪽으로 돌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현재 중국의 관할 아래 있는 백두산 인근 지역과, 이른바 ‘간도(間島) 땅’으로 불리는 두만강 이북 지역, 러시아에 귀속되어 있는 녹둔도(鹿屯島) 등은 과거 학계 일각의 잇단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점차 국민의 뇌리에서 잊히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뜻 있는 일부 학자들은 1909년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강제로 중국측에 빼앗긴 간도 문제에 대해서 하루빨리 논의를 재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독도보다 훨씬 더 복잡하면서도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오늘날 한·일 양국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분쟁은, 1905년(메이지 38년) 일본의 일개 현(縣·우리나라의 군에 해당) 정부가 발효한, 국제법적 효력이 전혀 없는 한 고시에서 비롯했다. 이른바 ‘시마네 현 고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고시의 주요 내용은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7도 55분, 오키도(島)로부터 85해리(157㎞)에 있는 무인도(즉 독도)는 타국이 이를 점령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자취가 없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 편입해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 오키 도사(島司)의 소관으로 한다’는 매우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한국을 식민화한 일본은 이듬해인 1906년 당시 울릉군수인 심홍택을 찾아 독도를 일본에 편입한 사실을 일방으로 통고했다. 말하자면 독도 문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측 억지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간도 지역은 비록 한국(조선)의 외교권(조약 체결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중국(청)과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간도 협약’이라는 좀더 그럴듯한 국제 조약의 틀 안에서 ‘합법적으로’ 중국측에 넘어갔다. 따라서 간도 영유권 문제를 재론하기 위해서는 1909년 청·일 양국 간에 이루어진 간도 협약의 적법성 여부가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게다가 독도와 달리 간도 지역은 백여 년 이상 한·중(또는 조·청)간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어왔지만, 아직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영토 구획 협상의 구체적인 대상인지조차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양국은 서로 유리하게 ‘간도 지역’을 설정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심지어 간도의 범위를 블라디보스토크 이북 지역으로까지 확장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거론되고 있는 간도 지역은 간단히 말해 ‘두만강 이북’ 지역을 뜻한다. 문제는 1712년(숙종 38년) 있었던 ‘백두산 정계비’ 건립 사건을 시초로 한다. 당시 중국을 제패했던 청나라 강희제는 자국 관리 목극등(穆極登)을 변계(邊界) 사정관으로 임명해 장백산(백두산)을 수차례 답사한 끝에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고 양국의 국경을 확정하는 내용을 비문으로 새겼다. 이전부터 청나라는 자기네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 일원을 수중에 넣기 위해 간도 지방을 ‘봉금 지대(封禁 地帶)’로 설정하여 한족(漢族)의 이주를 엄금하고 있었다. 당시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비문의 주요 내용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동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삼아 양국의 국경을 확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역이 다시 문제가 된 때는 정계 비문에 적힌 ‘토문강’이 중국측이 믿었던 것과 달리 ‘두만강(도문강)’이 아닌, 송화강 상류의 또 다른 강 이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이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청나라가 봉금 지역으로 설정했던 만주 일대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한(韓) 민족도 상당수 진출해 살고 있었다. 청나라는 원래 자기네가 선언했던 봉금 지역을 지키기 위해 1883년 토문강 이서와 이북 지방에 사는 한민족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이 지역 주민(한민족)이 두만강 발원지를 탐사해 보니, 목극등이 정계비에 기록한 토문강이 애초 청나라가 믿었던 것과 달리 두만강과는 전혀 별개의 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게 된 것이다.

조·청 양국은 이 문제로 인해 1885년(을유 담판)과 1887년(정해 담판) 두 차례에 걸쳐 ‘국경 협상’을 벌였다. 이른바 ‘감계 담판(勘界 談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두차례 회담에도 불구하고 간도 지역을 둘러싼 양측의 협상은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1895년 청·일 전쟁, 1902년 러·일 전쟁 등 국제 정세가 격변하자 중단되었다.
‘간도는 우리 땅’ 분명히 밝힌 <대한제국 전도>

이윽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제는 고종을 협박해 이른바 ‘을사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일제가 이어서 취한 조처는 간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전문가를 동원하여 광범위한 조사를 하고, 10만여 한인(韓人)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독립운동의 무대로도 유명했던 용정에 ‘통감부 파출소’까지 설치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강행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일제는 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탄광 채굴권 등을 청나라로부터 얻는 대가로 간도 지역을 청나라에 양도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 1조는 두만강으로 조·청 국경을 정하며 강원(무산 이서) 지방은 백두산 정계비를 근거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로 양국의 경계를 삼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간도 땅이 한국 영토라는 주장의 타당성과,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그동안 학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이 중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것이 간도 지역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묘사하여 한반도에 편입해 놓은 조선 시대 고(古)지도들이다(82~83쪽 고지도 참조). 최근에는 대한제국 때인 융희 2년(순종의 연호·1908년)에 근대식 제작법으로 작성된 〈신정분도 대한제국전도〉가 공개되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일제가 간도 협약을 체결하기 직전, 현공렴(玄公廉)이라는 사람에 의해 간행된 이 지도에 대한 해설은, 김영관씨(서울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에 의해 지난해 북방 문제 전문 학술지인 〈백산학보〉(제53호)에 자세히 소개되었다. 김씨의 해설에 따르면, 이 지도는 대한제국의 실권이 비록 일제 통감부에 넘어간 상황이었음에도 일본과 청국간 남만주 일대에 대한 이권 다툼이 확정적이지 못한 이유로 간행될 수 있었다. 이 지도에는 조선과 청국의 국경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도문강, 즉 두만강이 아님)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북간도 대부분이 한반도에 딸린 지역이라고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81쪽 지도 참조).

현재 간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하고 이를 여론화하려는 움직임이 가장 활발한 곳은 역사학계이다. 특히 김득황(재야 사학자)·양태진(동아시아 영토문제연구소)·육낙현(백산학회 총무이사·84쪽 상자 기사 참조) 씨 등 재야 사학자와, 배우성(서울대)·조 광(고려대) 교수 등은 수십 년간 간도 연구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며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있는 대표적인 연구자들이다. 또 강석화(서울대 규장각)·강창석(동의대)·신각수·이일걸(정치학·성균관대 강사) 씨 등은 1990년대 들어와 간도 관련 문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연구를 시작한 소장 연구자들이다.

최근에는 간도 문제를 국제법 테두리에서 연구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학자들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에서 간도 협약 체결 과정을 연구하고 돌아온 최장근씨(대구대 강사)와 국제법을 강의하고 있는 노영돈 교수(인천대)가 대표적이다. 특히 노영돈 교수 같은 이는 최근 들어 ‘간도 협약의 국제법적 무효성’ ‘간도 문제의 국제 소송 처리’ 등을 주장해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원인 무효인 간도 협약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중국의 간도 통치권은 ‘사실상의 지배에 불과할 뿐 국제법상 영유권은 한국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이다.‘간도 영유’ 중국은 물밑 작업, 한국은 침묵 일관

세부 논의점에 대해서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간도 연구가 사이에서 한결같이 일치하는 점은 이제야말로 간도를 둘러싼 북방 영유권 문제를 관련 당사국과 본격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중 일부는 간도 문제를 더 늦기 전에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에 보내 법적 해결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경 조약 등 국가간 체결된 조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은 ‘조약 체결 후 100년 이내’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르면, 한국이 간도 문제를 국제법에 호소할 수 있는 시기는 간도 협약 체결 100년째를 맞는 오는 2009년까지이다. 이 때까지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간도는 영원히 중국 영토로 확정될 공산이 높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한국 정부는 주권을 회복한 1945년 이래 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문제는 1990년대 한국과 중국간 수교가 이루어진 뒤에도 역대 정권이 보인 미온적인 행태이다. 주권 국가인 한국에서 간도 영유권 문제가 책임 있는 당국자 사이에서 제기된 것은, 1983년 국회의원 54명이 ‘백두산 영유권 확인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한 사실과, 1995년 국회에서 한 의원이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고작이다.

반면 문제의 한 당사자인 중국측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중국인들을 접촉하여 이 문제를 사적으로 논의했거나, 중국을 다녀온 인사들의 설명에 따르면, 중국은 이미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때 영유권 문제가 본격 제기될 것에 대비해 문제 지역에 대한 ‘영토 굳히기’ 작업을 음으로 양으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중국측이 역사(국경)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확고한 원칙을 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최대 강역주의’ 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중국 영토가 역사상 최대로 확대되었던 1840년의 강역(疆域)을 중국 역사의 기술 대상으로 함을 말한다. 당시 영토는 중국 본토 외에 만주·몽골·신장·티베트·타이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측이 발해의 역사와, 고구려사의 일부를 ‘중국 역사’로 해석하는 경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이에 따르면, 드넓은 만주 지역에 포함된 간도 일원은 ‘당연하게도’ 중국의 역사요 영토인 셈이다.중국은 일찍이 1990년대 초반부터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국경 정비 작업을 서둘렀다. 고구려사 연구가로 만주 지역을 몇 차례 방문했던 서길수 교수는 1990년대 초반 백두산 지역을 답사했다가 중국이 국경 정계표를 교체하고 있는 광경을 간접 확인하기도 했다. 1993년 11월 중국 지린성 정부는 중국측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의 논리를 중국측 입장에서 일일이 반박하는 내용이 담긴 〈중조변계사(中朝邊界史)〉 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1995년 중국 총리 리 펑은 당시 중국을 방문한 한국 총리에게 ‘한국인이 중국 영토인 백두산과 옌볜 지역(간도 지방)에서 고토(故土) 회복을 말하고 다닌다’며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영토 문제 연구가인 양태진씨는 “중국 정부 외교부 안에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간도 문제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모두 장래에 있을지 모를 영유권 분쟁에 대비해 미리 쐐기를 박아두려는 일련의 움직임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이미 간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에 대비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역사학자와 영토 문제 전문가는 북방 영토 영유권, 특히 간도 문제에 관한 한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려는 의견 그 자체를 비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일반의 인식이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이같은 태도가 타당하다면 한국측이 볼 때 역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억지를 일본이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하는 행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이들은 반문하고 있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결국 국제사법재판소를 통해 해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1차적으로 이제까지 수집된 소명 자료를 바탕으로 중국에 대해 반환 청구를 해야 할 것이고, 중국측이 이에 불응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로 가는 절차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중요한 것은 정부의 문제 의식과 의지이다. 영토 문제는 ‘계속 주장하지 않으면, 결국 현실적으로 문제의 땅을 점유한 나라에 우선권이 돌아간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통념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일찍이 1960년대에 체결된 것으로 알려진 중국·북한간 비밀 조약 등 간도 문제와 관련된 ‘중대사’들에 대해 무관심·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적어도 영토 문제에 관한 한 국가가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비판은 이같은 사정으로 더 설득력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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