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돌아온 역사 신파인가, 협잡인가
  • 정성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200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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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흥행 돌풍의 ‘이면’
이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깡패들(조폭은 무슨 조폭!)과 엽기적인 연인들과 ‘싸가지 없는’ 10대들이 들끓던 한국 영화가 갑자기 역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대중이 우리 근대사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이미 예고되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범인을 알 수 없는 1980년대 말 화성 연쇄 살인사건에 관한 (봉준호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농촌 스릴러’ <살인의 추억>을 5백30만명이 보았다.

그리고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크리스마스를 거쳐서 설날에 이르기까지 45일 동안 8백50만명이 1971년 8월20일 오후 2시25분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부대와 교전한 끝에 전원 자폭한 684 북파 공작 부대원들의 ‘베일에 싸인’ (무늬만) 역사(액션활)극 <실미도>를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단 한 편의 영화를 ‘거의’ 천만명이 기꺼이 보았다는 사실이다 (‘선수’들의 말을 빌리면 곧 천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인구 4천7백만 명인 나라에서 천만 명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다. 이 숫자는 지난 월드컵 때 가장 많은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독일전 응원 행렬보다도 많은 숫자이다! ‘하여튼’ <실미도>는 이상한 흥분을 몰고 왔다. 텔레비전과 신문 들은 홀린 듯한 심정으로 잊힌 역사 속의 사건을 끌고 들어왔다. 그런 다음 순제작비 1백42억원짜리(마케팅 비용 포함 1백90억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가 도착했다.

이 영화들을 단지 텍스트로 환원하는 것은 대중의 흥분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혹은 구경거리가 만들어내는 이 기괴한 광경의 전체주의적 매력을 놓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총체성을 사회적 전체성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집단적 최면의 실마리를 붙들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들 이것으로 한국 영화는 역사에 대해 반성하기 시작했으며, 게다가 (덤으로) 한국 영화산업은 잘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여기에서 현실의 모순을 역사의 신파로 위장하는 대중의 집단적인 동의를 본다. 대중이 역사를 끌고 들어올 때 그것은 현실에 불만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들은 그 불만족스러운 현실에 대한 대중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불려나온’ 역사(History)를 ‘만들어진’ 이야기(story)로 다시 읽어야 한다.

같은 말이지만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역사들이 웅성거리면서 갑자기 우리들 앞에 왜 나타났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1971년에 죽은 실미도의 684부대 북파 공작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그들의 죽음이 1980년대 말 화성연쇄살인범과 연관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이 역사의 기억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앞에 ‘거의 동시에’ 돌아온 것은 그 역사가 우리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역사의 공통점은 매우 간단하지만 입 밖에 꺼내기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수없이 죽었는데도 이상하게 아직도 풀리지 않은 비밀의 매듭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말 한국전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여전히 논쟁 중이다. 혹은 실미도 북파 공작원들이 왜 그렇게 죽어야만 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화성연쇄살인범은 아직도 붙잡히지 않았다.

그 비밀은 하수도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여인들의 한처럼(<살인의 추억>), 대낮에 버스에서 자폭해버린 침묵의 강요처럼(<실미도>), 미쳐버린 형을 버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동생의 무한정한 기다림처럼(<태극기 휘날리며>), 그렇게 버티고 서서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역사의 기억은 억지로 짓밟히듯이 침묵을 강요당해온 시간의 저편으로부터 유령처럼 회귀하는 중이다. 결국 역사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다. 그러나 역사는 두 번 배신당한다. 우리는 질문하기 전에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혹은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실 속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의 이름을 내걸고 해결되지 않은 과거 안으로 스스로를 밀어넣고 잠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들은 결국 같은 말을 하는 중이다. 이미 벌어진 역사를 결코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벌이는 영화와 대중의 타협은 사실상 협잡이다. 역사의 망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척하면서 그 앎의 금지가 된 대상을 못 본 척하기 때문이다(이 이중의 제스처!).

사실상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모르는 대상 앞에서 그냥 멈추어 선다. 바로 그 자리에서 두리번거린다. 왜 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가? 그것이 현실의 트라우마(정신적 장애를 남기는 충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답할 수 없는 과거의 시간으로 떠넘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예술적 승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역사의 기억을 끌어들여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불완전한 과거 사이를 도착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도착적인 까닭은, 불만족스럽기는 하지만 현실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과거를 더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현실과 과거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리고(혹은 스스로 그렇게 만들고), 그 안에서 역사가 무서워 벌벌 떨면서 그 결과인 현실을 못 본 척한다. 그것이 이 영화들을 보면서 자꾸만 비극에 매달리고, 거기서 눈물 흘리며 저 알 수 없는 대상에게 화를 내고 희생자들을 위해 우는 까닭이다.

기만적 카타르시스, 혹은 우리 시대의 엽기적 승화. 그러나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 이 영화들을 보면서 대중은 사실상 자꾸만 잊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자아를. 그렇게 해서 현실의 나를 괄호 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여기서 두 번 죽는다. 내가 보기에 한 편의 영화를 천만명이 보러 달려나가서 기어이 그 아비규환을 뚫고 표를 사는 것은 ‘노 브레인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기괴하게 웃긴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살을 에는 추운 거리에 자기의 일상적 삶과 아무 상관도 없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보러 나온 저 이상한 실천을 이해해야 한다. 저 광경은 우리 시대의 가투(街鬪)이다.

그러므로 일개 영화 평론가가 진심으로 충언하옵건대, 지금 천만명이 거리로 달려나간 이 광경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과 그 주변에 앉아 계신 분들과, 또는 대통령과 싸우는 분들)은 역사에 대한 비밀에 홀린 채 비통한 척하는 심정으로 위장한 이 대중의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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