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일본 연구, 감정은 ‘태산’ 실적은 ‘티끌’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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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본 연구 실태/기관 84곳, 인원 6백여명 되지만 실적 거의 없어
한국은 일본이라는 나라와 관련된 큰 국경일을 이틀이나 가지고 있다. 3·1절과 광복절. 지난 50여 년 동안 식민지 경험의 뼈저린 아픔을 해마다 되씹으며 그 날들의 감격을 기억해 왔으나, 그것은 감정에만 치우쳐 있었다.‘반일’‘극일’ 같은 구호만 난무했을 뿐, 한국 사회는 일본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연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아예 무시해 왔다.

한국은 지금도 일본이라는 나라를 잘 모른다. 얼마나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오늘날의 일본은‘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더욱 먼 나라’가 되어버렸다.

고려대 亞硏서 조사 발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지난해 1월에 시작해 얼마전 끝마친 ‘한국의 일본 연구 실태 조사’는 한국이 일본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보고서이다.

일본국제교류재단의 의뢰로 이루어진 이 조사는, 1천9백72명의 연구자에게 설문지를 보내고 이 가운데 일본 관련 연구자로 추정되는 5백90명으로부터 답을 받았다. 이는 국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교수나 박사 학위자, 연구기관에서 근무하는 석·박사 학위자의 숫자이다.

외형으로 보면, 한국의 일본 연구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6백명에 가까운 연구자들이 전공에 따라 일본을 파고들었다면, 일본에 대한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범벅된 감정 따위가 한국에 존재할 리가 없다. “일본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던 우리가 실제로는 일본 연구에 얼마나 소홀해 왔는가를 확인한 조사였다. 일본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는 극소수였다. 이것은 우리의 엄청난 지적 태만이자 수치이다”라고 최상용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는 말했다(상자 기사 참조).

설문지는 전공·학력·주요 저작 등 24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물었지만, 여기에 성실하게 답변해온 응답자는 거의 없었다. 최교수가 세 번이나 편지를 쓴 다음에 받은 답변지들조차 ‘일본 연구와 관련된 주요 저작(논문) 3권’ 항목을 대부분 빈 칸으로 남겨 놓았다. “문항이 많고 복잡해 설문에 응하는 것이 귀찮을 수도 있었겠지만, 설문에 친절하게 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연구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간접으로 드러낸다”라고 최교수는 설명했다. 설문 응답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연구자들이 ‘한국의 일본 연구가 다른 지역 연구보다도 뒤떨어져 있다’고 평가했다. 반면‘더 발달되어 있다’는 응답자는 12.6%에 불과했다.

전공, 어문학·정치사 편중

5백90명 가운데 일본만을 연구한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1백50명 정도이다. 나머지 응답자들은 비교 연구를 하거나, 한국사 혹은 미국·중국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 일본 자료를 본다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일본 전문가로 인정할 연구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이 숫자로 새삼 확인된 셈이다.

연구자들의 전공은 대부분 어문학에 치우쳐 있다. 응답자의 40.9%가 언어학·문학 전공자였으며, 정치학 13.7%, 역사 8.7%, 법학 8.6%, 경영학 6.5%, 경제학 6.1%, 그리고 인류학·심리학 등의 연구자가 나머지를 차지했다.

연구 대상 시기도 1868년 메이지 유신부터 현재에 이르는 근·현대에 집중되어 있다. 역사학도 메이지 시대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으며, 정치학·경영학 등 다른 분야는 주로 현대를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다. 늘‘일본 문화의 뿌리는 한반도에 있다’고 자랑해 왔지만, 그것을 학문이나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고대사‘연구’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응답자들이 밝힌 일본 연구의 목적에도 ‘극일’‘지일’과 같은 감정적 요소가 많이 개입되어 있다.‘전공이자 직업이기 때문에 일본 연구를 한다’는 응답자가 45.6%인 반면, 나머지 응답자는‘한국과 일본의 공존을 위해’‘극일을 위해’‘주변국으로서 시사점이 많기 때문에’‘한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등으로 답변했다.

97년 1월 기준으로 연구자들의 연령 분포를 보면 30대(29.5%)와 40대(37%)에 집중되어 있다. 박사 과정에 있거나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석사학위자는 설문에서 제외했으므로, 젊은 연구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일본 연구가 비록 질·양 수준에서 아직 발아기라 할 수 있으나, 그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61년 한국외국어대에 일어과가 처음 생겼으나,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대학에는 일본 관련 학과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왜 하필이면 일본이냐’는 인식이 팽배해 일본 관련 학과 입학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당시 용기를 가졌던 젊은 연구자들이 80년대 말부터 일본 유학 후 속속 귀국하기 시작해‘일본학 2세대’를 두텁게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연구가 최근 들어 부쩍 활기를 띠는 이유는 바로 일본학 2세대들 덕분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개별 연구자 조사와 함께 실시한 연구기관·도서관·박물관(미술관) 설문 조사를 보면, 기초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일본 연구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설문에 답할 수 있는 전문가도 없는 기관이 태반인 데다, 이 때문에 귀중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장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재정 확보·전문가 훈련이 가장 큰 문제

그나마 다행한 일은, 90년대 들어 일본 관련 연구기관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학과를 포함한 일본 관련 연구기관은 모두 84곳이다. 이 가운데 80%가 80년대 이후에 생겼으며, 절반에 가까운 48.6%가 90년대에 설립되었다. 정부나 공공 단체가 설립한 곳은 20% 정도이고, 나머지는 사립대나 민간 차원에서 세웠다.

그러나 일본 연구에만 전념하는 곳은 12%에 불과하며, 일본 연구 직책이 없는 연구소가 70%에 이르렀다. 연구기관들이 꼽는 과제는 재정 문제 해결이 가장 컸고, 전문가와 직원 훈련, 자료·공간 확보 순이었다.

‘한국의 일본 연구 실태 조사’의 실무를 맡았던 아세아문제연구소 최광필 간사는 “연구기관들이 80년 이후 집중적으로 생겨난 만큼 한국의 일본 연구 역사는 17년 정도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와 여전히 높은 반일 감정을 생각한다면 연구 수준도 그만큼 높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이다”라고 말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설문 조사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감정적으로만 작용해 왔다는 사실을 수치를 통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일본을 연구할 필요성과 중요성은 오래 전부터 강조되었으나, 일본 전문가가 대학에서 자리를 얻기도 어려울 뿐더러 일본의 장점을 표현하는 데도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감정만 앞세웠을 뿐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대응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을 감정적으로 소개한 ‘…있다’ ‘…없다’류의 에세이들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실시한 ‘한국의 일본 연구 실태 조사’는 일본이라는 나라보다는, 일본에 대한‘한국의 무지’가 더 무섭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일본 연구 실태 조사’에서 확인된 자료들은 오는 가을 인터넷에 편람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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