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평]그 나물에 그 밥 ‘올림픽 방송’
  • 김승수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 승인 1996.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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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복 편성과 승리 중독증 여전… 방송사 간의 역할 분담 절실
 
세계 최대 상업주의 잔치라고 일컬어지는 올림픽이 한창이다. 우리나라도 애틀랜타에 선수단을 대규모로 파견하여 메달을 노리고 있다. 마침 레슬링과 유도에서 금메달이 3개 나와 날밤을 새운 시청자에게 보답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나면서 올림픽 중계 방송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방송사들이 밤을 새워 중계 방송하고, 아침에 또 하고, 저녁에 또 방송하여 올림픽 열기를 확산시키고 있는데,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은 개운치 않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올림픽의 ‘올’자만 나와도 지겹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방송사들이 중계 방송에 대한 사전 합의나 치밀한 준비 없이, 그리고 명확한 원칙을 세우지 않고 마구잡이로 방송해 시청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 실황 중계인지, 녹화 중계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이쪽 채널에서 본 듯한 화면이 다른 채널에서 또 나온다. 이미 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똑같은 장면이 같은 시간에 방영되는 중복 편성은 매번 지적되는 사항이지만, 이번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채널 낭비이자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처사이다.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는 올림픽 중계 방송으로 스포츠를 싫어하는 시청자들은 또 한번 고역을 치른다. 한마디로 말해 올림픽 중계 방송은 무원칙·무계획·무철학 3무 현상으로 점철되어 혼란스럽다.

중계 화면은 전적으로 NBC가 공급하는데, 방송사가 2백명이 넘는 중계 요원을 내보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NBC가 공급한 화면을 가지고 중계 방송을 하는 사회자나 해설자 들이 승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흥분하는 경우가 많고, 게임 전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단순히 해설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문제로 지적된다.

자국민 위한 미국 방송사의 ‘횡포’도 거슬려

해외 여행도 제대로 못하고 경제력도 취약하여,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개발 시대에는 스포츠를 통해 국위를 선양한다는 순기능이 있었다. 또 당시에 혹독한 가난과 강훈련을 이겨내고 기어이 메달을 거머쥔 나이 어린 선수들을 보고 마음이 뭉클하지 않은 시청자는 없었다. 그래서 메달 땄다고 흥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온 국민이 덩달아 흥분하였다. ‘하면 된다’는 개발 독재의 이념이 스포츠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얼마나 바뀌었는가. 시청자들이 올림픽 같은 스포츠 중계 방송을 보는 자세나 감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방송이 인지했으면 한다. ‘누가 이겼고, 누가 졌는가’ 하는 데 집착하는 것은 시대 착오이다. 따라서 스포츠 캐스터와 해설자들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특별한 대책이 요청된다.

막대한 중계료를 지불하고 미국 NBC를 주관 방송사로 하는 애틀랜타 올림픽방송(AOB)과 계약했는데, 어디가 잘못되었기에 개회식 때 한국 선수단의 입장 장면은 온데 간데 없고 코카콜라 선전이 나오는가. 한국 국민이 관심을 두고 있는 탁구 같은 게임은 하는지 안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홀대받는 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수영이나 조정 경기를 꼭 보여주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밖에도 주관 방송사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이미 유럽 쪽에서 터져 나왔다. 유럽의 올림픽 방송 담당자인 유럽방송연맹이 AOB에 손해 배상을 요구하리라는 소식이다. 유럽방송연맹은 AOB가 미국 시청자 입맛에 맞는 종목을 중심으로 무성의하게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제 송신하는 처사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면서 손해를 배상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도 응분의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보다 올림픽에 대한 방송과 방송인들의 철학이 무척이나 구태의연하다는 점이 사실은 더 심각하다. 올림픽에 임하는 방송인들의 철학은 상업주의-국수주의-승리 중독증이라는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고 있음이 애틀랜타 올림픽 중계 방송에서도 반복되었다. 좀더 성숙한 자세로 세계 각국 선수들이 모여 규칙을 지키면서 기량을 겨루고, 그 과정에서 승패를 초월한 민족간· 인종간·국가간 선린 유대를 강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스포츠를 즐기려는 추세가 시청자들 사이에 늘어나고 있음을 방송인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와 국민들에게 당면한 문제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마취 기능, 그럼으로써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탈정치화 기능을 하고 있는 올림픽 방송의 속성이 이번에도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한 해의 국정을 평가하는 국회의 움직임조차 별로 보도되지 않는 실정이다. 국회 문을 열지 않는다고 질타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서는 모른 척하고 있다.

올림픽 방송이 국민을 탈정치화시켜서는 곤란

또 재벌 언론과 언론 재벌이 마치 카바레 영업권을 다투듯 몇 년간 지속했던 무한 경쟁의 후유증으로 보급소 직원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온 나라가 떠들썩해도 방송은 조용하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올림픽 방송이 중요하다 해서 방송의 저널리즘 기능을 능가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사실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우리 모두 침착하자. 스포츠라는 것이, 또 올림픽이라는 것이 지나면 별 일도 아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흥분하고, 핏대를 올릴 필요까지야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올림픽 방송은 국민의 탈정치화를 유도하는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국민들의 생활 리듬을 깰 정도로 마구 휘저어서도 안된다.

또한 방송사들이 프로그램 조정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되도록 중복 편성을 피해 시청자에게 채널 선택 폭을 늘려 주어야 한다. 방송사들이 올림픽·월드컵 같은 중요한 행사를 중계할 때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이 파괴되지 않도록 사전에 역할 분담을 하는 성숙된 자세가 요구된다. 국내외 주요한 행사를 중계 방송할 때는 방송사끼리 사전에 합의하여 중복 편성이나 반복 편성 같은 비생산적인 행위를 규제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 조정 기능을 법제화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지금같이 엘리트 위주 스포츠와 메달 따기 경쟁에 연연해도 좋은지에 대해서도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패기 발랄한 젊은이들을 가두어놓고 사육하듯 훈련시켜 이를 스포츠라고 즐길 것인가. 그리고 이들을 상업주의와 국수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전쟁터에 보내야 하는지 방송은 공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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