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문화예술계가 새 정부에 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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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8.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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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시장 급랭, 음반 시장 결빙, 화랑가 냉기류, 영화계 혹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예술계 역시 IMF 한파 속에서 동상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경제 난국을 포복으로 통과하고 있는 문화예술계는 ‘새 정부에 바란다’는 목소리를 내놓기가 난감하다는 표정이 없지 않다. 한 출판사 사장은, IMF 한파가 없었다면 출판인들은 벌써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벌에게 베푸는 특혜의 100분의 1만 지원해도 출판계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차근차근 문화 예술 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한 토대를 닦아 가야 한다. 김홍남 교수(이화여대 박물관장)는 “경제가 위기이지만, 지금 문화 예술 분야의 문제를 점검하지 않으면 21세기에도 문화의 시대는 또다시 유예될 수밖에 없다”라고 경고했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내놓은 문화 예술 분야 공약(84쪽 상자 기사 참조)에 대해 대체로 신뢰를 보이고 있다. 특히 김당선자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문화적 소양과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화 예술 분야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지난해 가을에 펴낸 문화·역사 에세이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에서 김당선자는 ‘언제나 한 발은 문화 위에, 한 발은 과학 위에 서 있을 때 우리의 찬란한 내일을 기약할 수 있다’고 쓴 바 있다.

지난 12월24일 오후, 작가 50여 명이 충남 공주교도소 앞에 모였다. 송기숙 박태순 이문구 조정래 최인석 이순원 은희경 신경숙 김영하 송경아 씨가 작가 황석영씨를 면회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황석영씨를 만나지 못했다. 교도소 앞에서 1시간 넘게 서성거리던 작가들은 면회가 거부당하자 성명서를 낭독했다. 작가들은, 93년 4월23일 구속된 이래 다섯 번째 겨울을 감옥에서 나고 있는 황석영씨가 방북했던 일이‘민족의 활력은 물론 상상력마저 원천적으로 불구화시켜 온 분단을 넘어서기 위한 작가로서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고통스럽고 외로운 실험이었다’고 강조했다.

작가들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문민 정부를 자처하는 현정부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헌정을 유린한 전두환·노태우 일당을 화합이라는 미명 아래 석방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체제 아래에서 박해받으며 저항한 의로운 이들을 아직까지 감금해 두는 이 당착과 무지를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교도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작가들은 박노해 시인을 비롯한 양심수들과, 표현의 자유 문제로 현재 재판에 계류되어 있는 작가 장정일씨, 검찰에 소환당했던 만화가 이현세씨 등을 떠올렸다.

문단“내면화한 검열 사라질 것”기대

문단은 새 정부가 출범하면, 분단 이후 내내 작가들을 옥죄어 왔던 ‘내면화한 검열’(한 사람의 예술가라도 감옥에 들어가 있다면, 그를 가둔 검열은 감옥 밖의 예술가들 내면에서 작가를 구속한다)이 사라지리라고 전망한다. 진보적 작가는 물론이고, 끊임없이 ‘나는 보수 우익이다’라고 강변해야 했던 진영에서도 폭넓게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소설 <태백산맥> 때문에 당국과 우익 단체로부터 시달림을 받아온 작가 조정래씨는 새 정권뿐 아니라 북한의 정권, 그리고 남북한의 민간 기구에 대해서도 똑같은 강도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정권이 교체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북한 정권은, 이제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통일에 대한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정권이 분단 상황을 이용하는 한 창작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조정래씨는 김당선자가 내걸었던, 문화 예산을 전체 예산의 1%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약이 당장 지켜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할 처지는 아니라고 말했다. 경제 위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표현의 자유를 촉구하면서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이전 시대보다 10배 이상 뛰어난 작품을 내놓겠다는 열정이 절실하다”라고 당부했다. 작가와 작품이 시장과 대중에 의해 보호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 출판인은 98년에 60%에 달하는 출판사가 무너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출판계는 암담하다. 서적 유통업계에서 부도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새 정부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학동네 강태형 사장은 “공공 도서관 기능 정착과 확충이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양서를 사기는커녕, 출판사들에게 책을 기증하라고 손을 벌리는 것이 공공 도서관의 현실이다. 강사장에 의하면 독일 같은 출판 선진국에서 지역 도서관은 지역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양서 구입·대출뿐 아니라 공연·전시·교육 마당이라는 것이다.

강사장이 보기에, 공공 도서관은 당장 큰 예산을 투입하지 않아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지방 문화원이나 관변 단체들에 지원되는 예산을 공공 도서관 쪽으로 돌리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전문 인력 확보도 병행해야 한다. 문화 인프라를 경영할 젊고 참신한 인력이 없다면, 기존 문화 인프라조차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파주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출판도시)를 추진하고 있는 열화당 이기웅 사장은 96년 10월,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출판·서적계 대표가 가진 간담회를 환기시켰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총재는 “21세기는 문화와 지식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므로 모든 문화의 기본인 출판·서적계의 발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라고 역설했다. 특히 김총재는 파주 출판도시는 출판 관련 업계는 물론 문화 전체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막대한 원동력이 될 것이므로 성공적인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계 “영화진흥공사 대폭 개선해야”

이기웅 사장은 출판도시 이외에도 국가 전산망 계획에 출판과 학술, 도서관, 도서 유통 정보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무엇보다도 행정 관료들이 출판 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고 전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출판 정책은 없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이사장은 말했다.

이현세씨 소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만화계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 확보를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다. 만화가 김수정씨는 “만화산업이 아무리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주장해도, 만화진흥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라고 말했다. 만화가들은 만화를 옥죄고 있는 청소년보호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만화계는 출판 만화 부흥이 만화 산업 발전의 첫 단추라고 인식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캐릭터 등 관련 산업의 출발점이자 주체가 출판 만화라는 것이다. 만화 평론가 한창완씨는, 청소년용과 성인용 만화를 분리해 유통하도록 규제하고 있는 청소년보호법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법 때문에 서적 총판과 서점들이 아예 만화를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의 뿌리를 문화라고 믿고 있는 김수정씨는 “돈을 투자하라는 것이 아니다. 만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투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영화계는 지난해 등급부여제를 골격으로 개정된 영화진흥법이 영화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후퇴시켰기 때문에 우선 이 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김당선자가 약속한 완전 등급 분류제와 민간 중심의 자율적 심의기구를 환영하고 있는 영화계는 영화진흥법 개선을 전제로 우선 영화진흥공사(영진공)의 비효율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화계는 영진공이 고가 장비와 시설, 거액의 진흥기금을 거머쥐고 영화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지만, 효율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낙하산 인사를 포함한 방만한 인력 구조, 영화 진흥보다는 영진공의 사업 실적 과시에 연연한 비효율적 사업들이 새 정부에서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혜준씨(한국영화연구소 기획실장)는 영화진흥위원회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영화계의 그늘을 찾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정책의 원칙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한국 영화의 국제 무대 진출 지원과, 영화 발전의 밑거름인 단편·독립 영화에 대한 정책도 구체화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박물관장·현대미술관장 장관급 돼야

김홍남 교수는 김영삼 정부가 경제만 그르친 것이 아니라면서 “정부인수위원회 안에 문화 전문가팀을 구성해 기왕의 문화 정책을 진단하고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김교수는 특히 지난 정부에서처럼 문체부장관 자리가 선심성 인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밝혔다.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결국은 누가 장관으로 발탁되느냐에 따라 그 해결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라는 김교수는, 전문가가 문체부장관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영남대 박물관장·미술 평론가)는 ‘산골에 처박힌’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치를 문제 삼으면서, 만일 옮기기 어렵다면 인사동이나 사간동 근처에 별관이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교수는 또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낮은 직급이 박물관과 미술관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중앙박물관 관장은 1급, 현대미술관 관장은 2급으로, 모두 문체부 문화예술국장 아래 직급이다. 그 바람에 박물관장과 미술관장이 세운 정책이 문체부 국장에 의해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교수는 중앙박물관장과 현대미술관장의 직급을 장관급으로 올려야 한다고 밝혔다.

문화 예술의 각 장르는 이제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포함되고 있다. 홍사종 정동극장 극장장은 ‘문화의 세기는 곧 문화산업의 세기’라고 규정한다. 홍극장장에 따르면, 지난 정부에서는 문화서비스론과 문화상품론이 공존하면서 서로 충돌했다. 전자는 상품의 질을 도외시한 채 서비스만 우선한 것이고, 후자는 질 높은 문화 상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한다는 것이었다. 국립극장과 전국 시·도 문화회관은 문화서비스론에, 예술의전당과 정동극장은 문화상품론에 근거해 운영해 왔다. 그러나 이 두 정책이 혼용되면서 경쟁력이 축적되지 않았고, 문화 상품의 유통 질서도 궤멸하고 말았다.

홍사종 극장장은 국립극장과 각 시·도 문화회관이 자생력을 가질 수 있게끔 특별법인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극장장은 “국가에서 100% 지원해 주면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다”라면서, 국가 문화기관들도 전문 경영인 체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문화기관 경영은 기업체 경영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진흥공사 예산, 문화 발전에 써야

문화기획가 강준혁씨(메타 대표)는 지난 정부에서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모두 과시용 문화 행사에 치중했다고 비판하면서, 지역 문화 축전은 IMF 시대일수록 더 충실하게 꾸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상품은 시장을 모두 외국에 내줄 수 있어도, 문화 서비스와 관광 분야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분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문화와 관광이 결합된 지역 축전을 키워내야 한다고 강씨는 강조했다.

해외 한국문화원의 기능을 대폭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유홍준 교수는 박정희 시대에 외국 여론의 입막음을 위해 만든 해외 한국문화원은 문화와 전혀 관련이 없는 기관들이라면서, 해외 한국문화원을 그야말로 한국 문화를 해외에 널리 알리는 교두보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강준혁씨도 같은 견해이다. 그는“그동안 해외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전략과 정책이 전무했다. 장기적이고도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가는 프로젝트를 시행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는 IMF 한파 때문에 문화 부문에 대한 새로운 예산을 집행하기 어렵다면 현재 집행되고 있는 예산을 꼼꼼히 살펴, 그것이라도 합리적으로 쓰이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교수에 따르면, 예술진흥공사의 예산 가운데 4분의 3이 인건비로 나가고, 그 나머지를 문화 예술 진흥에 쓰고 있다. 유교수는 “이런 구조에서 어떻게 문화 예술이 진흥되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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