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극장 단골손님’ 공포 영화의 새 판도
  • 김봉석 (영화평론가) ()
  • 승인 2004.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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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공포는 ‘귀신’이 지배한다
<페이스> <령> <인형사> <분신사바> <알포인트>까지 올 여름 한국 공포 영화는 무려 다섯 편이다. 지난해 여름 <장화, 홍련> <여우계단>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등 다양한 공포 영화들이 쏟아진 이래, 공포 영화의 향연은 여름의 연례 행사가 될 것 같다. 여름 한철 텔레비전 속 <전설의 고향>으로나 잠깐 즐기던 공포물이 언제부터 일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여름마다 그 공포 영화들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올 여름 공포 영화의 공통점 하나는, 모두 귀신이 나온다는 것이다. 공포물이면 당연히 귀신이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할리우드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초자연적인 존재를 모두 일종의 ‘귀신’으로 간주한다면 또 모르지만, 서양 공포 영화에는 원한 서린 귀신보다 성서 속의 악마와 민담에 등장하는 괴물,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연쇄살인마가 훨씬 많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고전에는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미라와 투명인간 등 고전적인 ‘몬스터’들이 등장한다.
유니버설 호러로 대변되던 할리우드 공포 영화가 크게 바뀐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최근 DVD가 출시된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년)은 인육을 먹는 좀비가 등장해 사람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엽기적인 사건으로 들리지만, 조지 로메로는 베트남전의 공포와 문명 비판을 적극 개진하면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을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끌어올렸다. 이후 ‘마음이 없는’ 살인마가 등장하는 <텍사스 살인마> <할로윈> 등이 사회적 공포를 선사했고, 1973년에 개봉한 <엑소시스트>는 공포 영화로는 처음 1억 달러 흥행 수익을 돌파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에는 신과 악마의 대결을 그린 오컬트 영화와 10대를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살인마가 등장하는 <13일의 금요일>과 <나이트메어> 같은 난도질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공포 영화는 여름마다 즐기는 대중적인 오락 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공포 영화는 10대와 마니아들의 오락물이었다. 진지하게, 혹은 감동적인 영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볼 영화는 아니라는 편견이 여전했다. 그 완강한 통념을 바꾸어 놓은 영화 두 편이 <스크림>과 <식스 센스>였다. 기존 공포 영화의 공식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도 패러디하는 지능적인 영화 <스크림>과 M. 나이트 샤말란을 단번에 거장으로 끌어올린 <식스 센스>의 성공은 ‘공포’라는 장르를 할리우드의 주류로 격상시켰다.

뿐만 아니라 1996년에 개봉된 <스크림>은 한국과 일본의 공포 영화 붐까지 촉발했다.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개봉된 <스크림>처럼, 1998년 일본의 가도카와 영화사는 <링>과 <라센>을 겨울에 동시 개봉하며 ‘겨울 호러’의 열풍을 일으켰다. 역시 1998년에 개봉된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은 한국 공포 영화의 중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단지 10대만이 아니라, 누구나가 흥미를 느끼는 대중적인 장르로 공포 영화가 자리 잡았음을 알려준 사건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지는 공포 영화는 분명한 경향성을 드러낸다. <링> <여고괴담> <식스 센스>의 공통점은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원한을 가진 귀신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동양적인 원혼이 동과 서의 관객을 동시에 사로잡은 것이다.

<식스 센스>는 뜯어볼 구석이 특히 많은 영화다. 인도계 미국인인 샤말란은, 자신이 귀신인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래서 구천을 떠돌아야 하는 귀신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것은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존재다. 그런데 그것은 샤말란의 것만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스터 오브 에코>와 <디 아더스>도 <식스 센스>와 유사한 공포를 보여주었다. 동양적인 정서가 그만큼 널리 퍼진 것이기도 하고, 할리우드가 동양의 공포를 그제야 깨달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식스 센스>는 할리우드 공포 영화의 방향을 재정립했고, 거기에 일본 영화 <링>의 공포가 방점을 찍었다. 2002년 할리우드에서 <링>의 리메이크판이 만들어진다. 일본판과 미국판을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미국판은 논리와 이유를 철저하게 분석하려 애쓴다. 사다코를 어린아이로 설정하고, 유년의 학대가 그녀를 원혼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판 <링>은 타자에 대한 사회의 억압, 현대 문명의 공포 등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모두 설명하지 않고, 느낌과 뉘앙스만으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본판 <링>은 충격요법에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에 사다코를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을 경악에 빠트렸다. 이후 <링>은 한국 공포 영화가 수없이 반복하고 베끼는 원형이 되었고, 동서를 막론하고 21세기 공포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지금 할리우드에서는 일본 공포 영화 리메이크가 한창이다. 가을에는 <주온>을 리메이크한 <주온-그럿지>가 개봉할 예정이고, <검은 물밑에서>와 <링2>도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링>처럼 완벽한 할리우드 리메이크가 아니라, <주온-그럿지>는 시미즈 다카시가, <링2>는 나카타 히데오가 직접 연출하는 일종의 합작 시스템이 된다는 점이다. 난조에 빠지면 언제나 외부에서 새로운 재능을 받아들여 활력을 얻었던 할리우드답게, 일본의 공포 영화 감독을 불러들여 ‘새로운’ 할리우드 공포 영화에 도전하는 것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여전히 <링>의 영향권 아래 있기는 하지만, 도시 괴담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고 있다. 가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블레어 위치>를 연상시키는, 도시 곳곳의 떠도는 이야기와 괴담을 담은 공포물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집을 찾아가면서 계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주온>의 상황처럼, 지금 한국에서는 흉가 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제 공포는 오래된 우물이나 구미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다. <소름>과 <4인용 식탁>이 말하는 것은 근대의 악몽이다. <4인용 식탁>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다. 그곳에서 여인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한국 공포 영화의 부활을 알린 <여고괴담>이 성공했던 이유는 고등학교의 억압과 공포라면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폭언 한마디, 발길질이 아니라 위압적인 건물 자체만으로도 숨막히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와 달리 동양의 공포 영화들은 유난히 희생자에게 시선을 많이 돌린다. 사실 <링>의 사다코와 <주온>의 가야코는 희생자였기에 원한에 집착하고, <검은 물밑에서>의 원혼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엄마’의 존재다. <장화, 홍련>의 공포가 비롯된 지점은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자학이었고, 자신이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었다는 회한이다. 그 슬픔이 전해질 때, 그들의 원한이 슬픔과 고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공포는 배가된다. 제이슨이나 프레디 같은 살인마는 그냥 싸워서 물리치면 되지만, 동양의 원혼은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만 해결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싸움이나 대결이 아니라 화해다.

2000년 쏟아져 나온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하피>는 모두 일방적인 난도질 영화였다. 여기에는 슬픔이나 연민 같은 것이 끼어들 수 없었다. 그나마 <가위>가 가장 무섭고, 약간의 여운도 있었다. 난도질 영화가 일종의 액션 게임 같은 느낌을 준다면, 원혼의 복수를 그린 영화는 경악과 공감이 어우러지는 드라마다. 찢어지는 소리와 툭 튀어나오는 충격요법은 공포가 아니라 일종의 쇼크다. 공포를 느끼려면 어딘가에, 누군가에 감정 이입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공포 영화는 오히려 느리게 진행된다. <식스 센스>와 <링>은 서서히 관객을 끌어들이고, 마지막의 반전 하나로도 관객을 공포와 감동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올 여름 한국의 공포 영화에서 부족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똑같이 원한에 사로잡힌 귀신이 등장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좀처럼 공감할 수가 없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나마 몇 년 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분신사바’ 놀이를 소재로 삼은 <분신사바>와 전쟁의 공포를 공포 영화의 스타일로 끌어들인 <알포인트>다.

소재 자체로만 본다면 ‘복안(復顔)’을 다룬 <페이스>나 인간이 버린 인형의 슬픔을 그린 <인형사>도 특이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단지 소재주의에서 그쳐버렸다. 공포 영화는 소재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공포 영화는 가장 진부한 이야기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공포를 끄집어낼 수 있는 장르다. 마찬가지로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에서, 가장 일상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여름마다 공포 영화를 찾는 것은, 단지 서늘함을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이유가 가장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공포 영화는 우리가 잊고 싶은 것을 일깨우는, 무의식에 잠들어 있는 진실을 속삭이는 장르다. 수많은 괴물들의 얼굴은, 원혼들의 저주와 복수심은 이 위험한 현대 사회의 절규이자 경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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