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치 철학자'에게 철학적 사면 시도
  • 구승회 (동국대 교수·철학) ()
  • 승인 2001.03.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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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 지음 <하이데거와 나치즘>



1931년에 헤르만 뫼르헨이 트로츠키의 저서를 들고 토트나우베르거로 하이데거 부부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뫼르헨 씨, 그 따위 책을 들고 다닐 게 아니라,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필자는 8년 전 한 작은 철학 잡지에 〈나치주의자 하이데거〉라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후 이 문제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게으르고 무능한 탓에 깊이 접근하지 못했다. 새해 벽두에 나의 이런 관심사를 자극하는 책을 만났다.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 반갑고, 고맙고, 존경스러운 마음에 <시사저널>에 전화해서 여덟 장짜리 서평은 좋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우겨서 어렵게 지면을 늘렸다.


하이데거가 걸은 '제3의 길'은 사도(邪道)인가


1987년 필자가 독일에 막 도착했을 때 '하이데거 논쟁'은 '역사가 논쟁'과 맞물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학문 논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필자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게다가 유학 초기의 지적 허영으로 관련 서적 두 권을 읽었다. 프라이부르크의 경제사학자 후고 오트의 책 〈마르틴 하이데거:그의 전기를 찾아서〉와, 칠레 출신으로 1960년대 이래 프라이부르크에서 하이데거 철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베를린 대학 교수로 있는 빅토르 파리아스의 〈하이데거와 나치즘〉이 그것이다.

당대에 하이데거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었던 사회과학자·자연과학자·철학자(후설이나 야스퍼스) 중 누구도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는데, 왜 하필이면 '숨은 철학자의 왕'을 꿈꾸던 하이데거가 나치에 연루되었단 말인가? '만학의 여왕'이라는 '철학의 자존심'임을 앞세워, 철학은 철학자와 별개의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면 철학자의 사회적 책임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모든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처럼 살라는 말인가?

박교수의 책은 이런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물음에 차근차근히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①하이데거가 선택한 '국가사회주의'라는 제3의 길―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싫어서―은 정말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도(邪道)인가? ②그가 언제까지, 얼마나 깊이 나치에 연루되어 있었는가? ③'20세기 플라톤'이고자 했던 그의 철학적 야심에 비추어 볼 때, 그의 선택은 바보 같은 순진함도, 정치적 야심과 기회주의적 태도 때문도 아닌 어떤 심오한 '철학적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④만약 ③이 성공적으로 논증된다면 히틀러의 나치즘과 하이데거의 나치즘은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관이 아니었을까? ⑤하이데거는 전후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나치즘을 극복하고 있는가?

사진설명 '존재'의 굴레 : 하이데거(사진)는 나치 운동을 독일 민족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히틀러를 적극 지지했다.

그동안 많은 옹호와 비판이 난무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치즘은 '아우슈비츠'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1933년은 아우슈비츠가 문제가 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한때 나치주의자였던 사람의 죄를 평가할 때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나치에 대한 연상에 그대로 투사해서는 안된다"(빈프리트 프란첸). "하이데거의 나치 협력이 불미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범죄적이지는 않았지 않느냐. 오히려 하이데거는 1933년 이래로 인종주의를 공격했다"(E. 페디에르). "그가 평생 나치 이데올로기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파리아스 식의) 비판은 전형적인 매카시즘이다"(알렉산더 슈반).

오트와 파리아스말고도 "그의 오류는 나치의 '유태인 말살'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했다는 사실, 즉 유태인 말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이에 대해 침묵하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데 있다"(J.F. 료타르)든가, "후기 하이데거식 해체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 정치적·윤리적인 오류까지 해체의 수법으로 호도하려고 한다"(J.F. 료타르)는 비판도 있다. 특히 파리아스의 비판에 대해 "그 사람은 단 한 시간도 하이데거를 읽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데리다)라든가, "이 책에서 얻을 것이라곤 사실상 하버마스의 서문뿐이다"(슈라이버)라는 빈정거림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독일 학계의 보수성과 인종차별적 편견을 감안하고 들어야 할 것이다.

필자의 의문은 이러하다. ①똑같은 역사학자인데, 오트의 역사적 설명은 '심리학적'이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하고(하이데거와 같은 바덴 지방 출신인 오트는 다른 사학자에 비해 비슷한 습속을 가진 하이데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놀테의 해석이 항상 우월한 지위에 놓이게 되는 이유 ②전혀 증거 능력이 없는 아들 헤르만 하이데거의 증언을 결정적인 순간에 증거로 채택하는 이유 ③1933∼1934년에 '나치의 노선이 유동적이었다'는 반사실적인 주장 ④하이데거가 나치즘과 동거한 것이 '시대와의 치열한 대결'이라면, △전후 하이데거 철학에 대결의 성과가 나타나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 나치 이전과 이후가 연속적이라고 주장하는 점 △철학이 시대와 진지하게 대결한다 함은 '비판하는 일'말고 달리 길이 없을진대, 하이데거가 국가사회주의를 통해 독일의 문명적 재건을 의도했다면, 그가 철학의 사명을 잘못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 △카톨릭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하이데거가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을 대신할 무엇을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찾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 '대결'인가, 아니면 '야합'이라고 하면 안되는가?


철학적 진리도 역사 속에서 구성된다


저자는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한 동기를 역사보다는 철학에서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하이데거에 대한 '철학적 사면'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존재 철학이 오직 나치와 협력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비의적(esoterik)인 철학'이 아니고는 안될 것이며, 현대 기술 문명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길이 고향을 찾는 길이라면, 우리는 두 개의 나치즘(하이데거의 나치즘, 히틀러의 나치즘)―하나만으로도 인류 최악의 야만적 재앙인데―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적 진리는 역사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그 진리는 오직 역사 속에서 구성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역사보다 더 명징한 '논리'를 가질 수 없으므로, 철학보다 역사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 과거 독재 시절 하이데거보다 몇 배 더한 자들이 버젓이 활개치는 한국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철학적 사면'은 좋지 못한 선례가 될 우려가 있다.감독/장 진

주연/신현준·신하균·정재영·원 빈

제작/시네마서비스


서울 한복판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고와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007 영화를 방불케 하는 사건 현장에서 유유히 걸어나오는 남자 넷. 그들은 첩보 영화의 주인공처럼 경찰을 비웃으며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상연(신현준)·정우(신하균)·재영(정재영), 하연(원 빈). 이 4명은 전문 킬러다. 냉철한 성격으로 팀의 리더인 상연, 폭약 전문가인 정우, 사격에는 달인인 재영, 컴퓨터에 능통한 막내 하연. 최고 킬러인 그들은 경찰이나 법보다 때로는 자신들이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의뢰인들은 갖가지 사연을 가지고 킬러들을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반당한 여인, 등창이 썩어가는 영감을 보다 못한 할머니, 자기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사람까지. 킬러들은 의뢰인이 원하는 날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처리한다. 계약서도 쓰고 학생은 할인도 해준다.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어느 날 킬러로서의 존재를 위협하는 절체절명의 사건 의뢰가 들어온다. 이들이 좋아하는 아나운서 오영란(고은미)이 살인을 의뢰해온 것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이들은 긴급 작전을 펼친다. 예리하고 명석한 조검사(정진영)의 수사망이 점점 좁혀오자 쫓고 쫓기는 숨가쁜 추격전이 벌어진다.



김영진★ 5개 중 3개

장진의 유머 물이 올랐네




장 진의 세 번째 영화 〈킬러들의 수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아니,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고 해도 좋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그리고 단편인 〈극단적 하루〉에 이르기까지 장 진은 간첩이나 킬러 같은 전문가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임무 수행에 쩔쩔 매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끌어냈다. 〈킬러들의 수다〉도 웃음을 주는 방식은 비슷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문득 드러내는 인물들의 인간적인 빈틈에서 유머를 보게 하는 것이다.


상연·재영·정우·하연은 의뢰받은 살인 청부를 빈틈없이 처리하는 살인청부업자이다. 하지만 이들이 죽여야 할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등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 꼬리를 물면서 상황이 꼬여 간다.


〈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에서 한 박자 늦게 웃기는 장 진의 타이밍 감각은 유별났다. 연극 연출자 출신인 그가 영화 매체에 적응하지 못한 탓으로 보였던 그 타이밍 감각이 이 영화에서는 개성이 된다. 이제 우리가 그의 타이밍 감각에 익숙해진 것이다. 웃겨주기를 기대한 순간에는 시치미를 떼고 '이게 뭐야' 할 때쯤 웃기는 상황을 펼쳐 놓는다.


범죄자를 취조하던 검찰이 유력한 증인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카메라가 천천히 범죄자의 얼굴로 이동하면 그는 짐짓 슬픈 얼굴로 자기 감정을 과장하고 있다. 이윽고 검찰이 나가면 계속 울고 있던 범죄자는 눈물을 딱 그치고 평상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때 화면은 가차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풀어주었다 놓아주는 이 코미디 감각은 조금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관객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이 리듬에 적응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역과 단역 인물들에게도 인상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은 〈킬러들의 수다〉가 지닌 큰 장점이다. 그러나 앞선 두 영화와 달리 꽤 대중적 호흡에 신경을 쓴 이 영화는 사회 주변부 인물들에게 영웅주의의 외피를 입히는 클라이맥스에서 시시해진다.


오페라가 열리는 극장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의 대단원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그늘 속의 전문가들과 아웃사이더들에게서 빈틈을 잡아내 공감을 주는 장 진의 코미디와 어울리지 않는다. 익숙한 상황을 보여주고 좀 엉성하게 폼을 잡으며 반찬의 가짓수를 늘렸지만 내실이 없다. 〈기막힌 사내들〉과 〈간첩 리철진〉의 황당하지만 씁쓸한 결말과 달리 말랑말랑하고 맹숭맹숭한 여운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 실망하기는 이르다. 장 진식 유머의 타이밍 감각만큼은 이제 본궤도에 오른 느낌이 든다.



심영섭★ 5개 중 3개

킬러들의 '구라' 웃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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