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폭발한 '진주만' 아찔한 '15분'
  • 노순동 기자 (soon@e-sisa.co.kr)
  • 승인 2001.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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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풍성한 여름 극장가, 볼 만한 영화


올해 여름 극장가 대회전은, 〈진주만〉의 공습으로 시작되었다. 〈진주만〉은 엇갈리는 평에도 불구하고 역대 주말 흥행 성적에서 최고치를 기록했다. 공습은 상징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몸집 큰 블록버스터가 쏟아지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한국 영화는 일치감치 '꼭꼭 숨었다.' 이미 시작된 여름 영화 전쟁, 뭘 볼까?




6월 개봉이 확정된 영화 가운데 눈에 띄는 작품은 〈간장 선생〉(93쪽 기사 참조)과 〈15분〉 〈토털 웨스턴〉 〈툼 레이더〉 〈물랭 루즈〉 등이다.


액션 스릴러에 미디어 비판을 가미한 〈15분〉 (연출 존 허츠펠드)은 덩지와 짜임새를 고루 갖춘 작품이다. '스타 경찰' 역을 맡은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도 일품이지만 '무뇌증을 앓는 미국 대중 문화'에 대한 자기 진단이 돋보인다.


러시아와 체코 출신인 막가파 주인공 두 사람은, 자신들의 범행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방송사에 팔아 넘김으로써 미국을 조롱하려 한다. 그들이 미국을 파악하는 창이 텔레비전이기 때문이다. 토크 프로에서는 며느리와 정분이 난 시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뉴스 프로는 좀더 '센 것'을 찾아 헤맨다. 이미지가 좋으면 일이 쉽게 풀린다는 것을 아는 경찰이 그런 미디어의 선정성에 장단을 맞춘다.


두 범죄자가 미국 사회에 대해 내리는 총평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통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법도 배운다. 하지만 영화에서 최후의 승자는 미디어를 통해 변신을 꿈꾸었던 범인이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다. 비판하는 자와 비판의 대상이 자주 한몸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15분〉의 화면은 어지럽고 폭력의 쾌감이 전편에서 배어 나온다.




풍자와 유머 : 로버트 드 니로의 <15분>(왼쪽)과 프랑스산 액션 <토털 웨스턴>은 풍자·스릴·유머를 고루 갖추고 있다.


프랑스산 액션 영화 〈토털 웨스턴〉도 그와 비슷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폭력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스크린은 피로 칠갑이 된다. 동료의 실수로 마피아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조직원의 도피극이 주요 얼개다.


시골의 한적한 청소년 감화원에 몸을 숨긴 제라르는 자신을 불신하는 아이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추적하는 조직원들과 사투를 벌인다. 영화의 성격은 제목을 번역해 놓으면 더 실감이 난다. '완전 서부극.' 전편에 흐르는 유머는, 서부극에 대한 패러디와 오마주를 뒤섞는 솜씨 덕분이다.


6월30일 개봉하는 〈툼 레이더〉는 7월 내내 불꽃이 튈 대작 경쟁의 도화선이 되는 작품이다. 인기 게임을 소재로 한 〈툼 레이더〉는 게임의 여전사 라라 크로포트 역을 맡은 안젤리나 졸리의 매력 때문에 일찌감치 회자되기 시작했다. 국내 시사가 늦어지는 대신 할리우드 현지 발 기사가 붐을 조성하고 있다.


같은 날 개봉하는 〈물랭 루즈〉가 〈툼 레이더〉에 맞불을 놓는다. 올해 칸 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물랭 루즈〉는 니콜 키드먼의 매력을 홍보 카드로 내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관객이 뮤지컬에 익숙치 않다는 점이 단점이지만 화려한 볼거리가 유인 요소다.


공포 영화는 여름 극장가의 단골 메뉴다. 이미 개봉한 〈엑소시스트〉를 필두로 한 공포 영화가 여러 편 대기 중이다. 일본 영화 〈유리의 뇌〉, 독일 영화 〈아나토미〉(〈시사저널〉 제606호 참조), 미국에서 선전하고 있는 〈미라 2〉, 패러디 영화를 표방한 〈나는 네가 지난 13일 금요일 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가 모두 6월 중에 개봉된다. 7월에 본격화할 대작들의 공습을 피해 일치감치 보따리를 풀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화력은 그리 센 편이 못된다. 해외에서 뒤이어 개봉한 〈진주만〉에 연거푸 자리를 내주고 있는 〈미라 2〉가 15년 만에 증보판으로 선보인 〈엑소시스트〉의 기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작들 틈을 비집고 들어선 홍콩 영화 두 편은 모두 '배우를 위하여'를 외친다. 〈첨밀밀〉 이후 몇 년 만에 호흡을 맞춘 장만위와 리밍의 연기를 볼 수 있는 멜로 영화 〈소살리토〉와, 류더화의 초췌한 모습이 인상적인 스포츠 멜로 〈파이터 블루〉다.


비상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리밍)와 아들과 함께 택시를 몰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혼녀(장만위)의 로맨스가 중심 축인 〈소살레토〉는 장만위를 위한 영화다. 영화 자체는 〈첨밀밀〉의 격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군용 점퍼를 걸치고 거리를 누비는 장만위의 강단 있는 매력은 그런 아쉬움을 메우고 남는다.


킥 복서의 애환을 그린 〈파이터 블루〉는 류더화에 의한, 류더화를 위한 영화다. 상대 선수를 살해한 혐의로 수감되어 15년을 복역한 왕년의 명 킥복서 맹호는, 출감 후 비로소 자신에게 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정체를 알고 실망한 딸을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불명예를 청산하기 위해 그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 후반 20분 가량은 챔피언과의 처절한 경기 장면에 할애된다. '파이터의 우수'라는 제목대로, 주인공의 고독한 내면과 피 튀기는 경기를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스필버그 등 거장들의 SF 대결도 볼거리




7월에는 본격적인 덩지 경쟁이 시작된다. 미·일을 가로지르는 애니메이션 대회전이 펼쳐지고(91쪽 상자 기사 참조), 〈진주만〉의 제작비 최고 기록을 곧바로 갈아치운 컬럼비아의 3D 영화 〈파이널 판타지〉가 기다리고 있다. 제작비 1억5천만달러(약 1천8백억원)를 투입한 〈파이널 판타지〉는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는 게임 영화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세계적으로 3천 만장이 넘게 팔린 인기 인터렉티브 게임을 영화화한 것으로, 괴생명체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를 빼앗는 미래의 위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게임 시리즈의 감독이었던 히로노부 사카구치가 직접 영화를 지휘했고, 알렉 볼드윈 등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언뜻 보면 컴퓨터 그래픽인지 배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표정 묘사가 섬세하다는 것이 영화사측의 자랑이다. 컬럼비아의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는 최근작은 〈스튜어트 리틀〉. 컴퓨터가 그려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디지털 쥐의 활약이 돋보인다. 컬럼비아측은, 〈파이널 판타지〉 이후에는 영화가 꼭 배우를 써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캣츠 앤드 도그〉는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에 기댄 동물 영화로 유사 애니메이션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7∼8월에는 거장들의 SF 대결도 볼 만하다. 팀 버튼 감독이 고전을 리메이크한 〈혹성 탈출〉을 선보이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메가폰을 잡은 〈A.I〉(인공지능)가 대기하고 있다. 팀 버튼은, 메이저 시스템에서 개성을 꽃피우고 있는 몇 안되는 감독이라는 점에서 열성 팬이 많다. 〈A.I〉는 작고한 스탠리 큐브릭이 구상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 영화는 "꼭꼭 숨어라!"




한국 영화는 공습 경보가 내려진 듯 모두 대피 중이다. 당분간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친구〉의 세몰이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당초 여름 극장가에서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무사〉(연출 김성수)는 5월에서 7월로, 다시 9월로 개봉 시점을 연기했다. 6월에 〈수취인 불명〉(연출 김기덕)과 〈신라의 달밤〉(연출 김상진)이 체면치레를 할 뿐 7월 개봉 예정작은 아예 한 편도 없다. 〈수취인 불명〉은, 김기덕 감독의 전작보다는 관객이 많지만 시장에서 유의미한 숫자로 보기 어렵다. 〈신라의 달밤〉(연출 김상진)은 3년 전 〈주유소 습격 사건〉의 신화를 만들었던 팀이 다시 뭉쳐 만든 작품이다.


올해는 한국 공포 영화도 찾아 보기가 어렵다. 5월 중순 개봉할 예정이었던 심리 공포물 〈소름〉은 아예 8월로 늦춰 잡았다. 7월12일부터 열리는 부천 판타스틱영화제 폐막작으로 잡혀 있는 것으로 보아 제작 일정 때문이 아니라 배급에서 밀린 것이다. 지금, 외국 고래 싸움에 한국산 새우들은 잠수 중이다.‘무의식’과 ‘논리’
조화시킨 판타지-김영진



정신분석 의사에게 상담을 청하기 위해 누워 있는 환자는 일종의 무대에 서 있는 것과 같다. 환자는 몽상과 강박증 증세를 이야기하고 의사는 그것을 듣는다. 의사는 환자의 무의식에 슬쩍 들어갔다가 빠져 나온다. 그 체험, 타인의 무의식에 빠져 들어가는 체험이 아마도 ‘모탈 트랜스퍼(mortal transper)’일 것이다.



오랜만에 영화를 만든 장 자크 베넥스의 <모탈 트랜스퍼>에는 여전히 나름의 매력이 있다. 이 영화는 거세공포증을 불러오는 남성 욕망의 어두운 그늘에 대한 어둡고 매혹적인 보고서다.



<모탈 트랜스퍼>의 주인공인 정신분석의 미셸은 황당한 상황에 빠진다. 그는 남편에게 얻어맞으며 성적 만족을 얻는 미모의 여성 환자 올가의 사연을 듣는다. 어느 날 올가와 상담하던 그는 잠시 잠에 빠져 꿈에서 누군가가 올가의 목을 조르는 광경을 본다. 잠에서 깨어난 그의 곁에서 올가는 실제로 목이 졸린 채 죽어 있다.



미셸은 혹시 자신이 가최면 상태에서 저지른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의 무의식을 엿듣는 관객이었던 그는 이제 자신이 꾼 꿈의 무의식의 복판에서 현실의 일을 해명해야 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무의식적인 꿈의 세계와 논리적인 추리 영화의 플롯을 조화시키면서 이 영화는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이 자기 정체를 밝히는 히치콕 식의 플롯을 차용했다. 거기서 알지 못했던 진실이 밝혀진다. 올가에게 욕망을 느꼈던 이는 미셸뿐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 대다수가 그랬다. 모두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욕망을 이루지 못해 앓고 있는 환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진실일지 모르지만 <모탈 트랜스퍼>는 그 당연한 진실을 황홀한 꿈의 세계에 얹어 보여준다. 여성의 성기가 드러난 쿠르베의 그림을 포착한 처음과 끝 장면이 암시하듯, 세계의 시초인 여성의 자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남성들의 무의식적 결핍을 꿈의 논리로 덮는다.



꿈처럼 몽롱하게 사건의 실타래를 하나둘씩 푸는 이 추리 영화는 서둘러 결말을 알고 싶지 않게 만든다. 이것이 꿈인지, 꿈 같은 현실인지, 꿈속의 꿈인지 내내 관객이 헷갈리는 동안 미셸은 현실과 환상의 조각더미에서 헤맨다. 전형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영화 치고는 결말이 다소 싱겁지만, 그때까지 결코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꿈의 판타지를 적어도 반쯤은 경험하게 만든다.





섬뜩하고 유쾌한
한바탕 ‘호접몽’-심영섭




장자크 베넥스가 <디바> 이후 21년 만에 내 놓은 <모탈 트랜스퍼>는 <베티 블루>에서 보여주었던 강렬한 이미지와 정서적 폭발 대신 정적이지만 몽환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살인이 일어난 상담실의 차창 밖에는 하염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수정 구슬 속 자신의 꿈을 바라보는 듯 취한 느낌에 젖게 한다. 정신분석 의사와 환자라는 경계를 지워내며, 인간의 내밀한 판타지를 훔쳐보게 한다는 점에서 <모탈 트랜스퍼>는 히치콕의 <이창>과 닮았다.



정신분석의 미셸 뒤랑은 툭하면 남편에게 얻어맞는 피학성 성적 취향을 즐기는 올가를 상담하다 끌리게 된다. 잠에 빠져 있었던 그는 그녀를 목 졸라 죽이는 꿈을 꾼다. 상담실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올가에게 똑같은 욕망을 품게 된다.



정신분석에서 회자되는 일화들이 구체적인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상담실은 그야말로 인간들이, 그리고 베넥스 자신이 마음의 옷을 벗는 장소로서 무의식의 깊은 우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실제로 장 자크 베넥스를 서울에서 만났을 때, 그는 6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결국 원제 ‘죽음의 전이’는 정신분석 의사에게 환자들이 느끼는 묘한 감정뿐 아니라, 삶 자체가 죽음으로 가는 치명적 전이 과정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한 살인 사건을 통해 은유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성의 성기는 마치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이라는 그림처럼, 남성들이 생각하는 기원이자 종말, 탄생과 죽음의 관문인 여성, 성과 죽음의 집약체로서의 ‘그곳’에 대한 직시와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모탈 트랜스퍼>는 영화의 자막이 올라가면 잊기 힘든 한바탕 호접몽을 꾼 것 같은, 그리고 마침내 그 내면의 잠에서 깨어난 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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