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6년째 이끄는 김동호 집행위원장
  • 고재열 기자 (scoop@e-sisa.co.kr)
  • 승인 2001.10.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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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영화인들, 술로 평정했다"/
영화는 프로그래머에게 맡기고 행정 '궂은일'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은 두 번 놀랐다. 자신의 영화에 관객이 꽉 차는 것을 보고 놀랐고, 관객 대부분이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또 놀랐다. 빔 벤더스 감독의 말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수준 높은 관객이 열성적으로 참여한다는 것.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렇게 자리 잡히게 된 것은 창립 때부터 올해까지 6년째 영화제를 이끌고 있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공이 크다. 김위원장은 독보적인 외교력으로 짧은 기간에 이 행사를 국제적인 영화제로 끌어올렸다. 지난 10월9일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영화제(11월 9∼17일) 준비에 분주한 그를 만나 보았다.


인사 치레로 '영화제 준비에 힘들지 않느냐'는 말을 꺼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내 나이가 올해 예순다섯인데 서울과 부산을 매주 서너 차례씩 오가며 일을 본다. 영화제가 시작되면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녀야 할 만큼 바쁘다. 그런데 정말 힘 빠지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안이한 지원이다. 영화제가 6회째인데 아직도 예산이 부족해 쪼들리고 있다. 내년에는 정부 지원도 끊긴다니 걱정이다."


"퀵 오토바이 타고 다녀야 할 만큼 바쁘다."


그래도 그에게는 든든한 우군이 있다. 영화제 때마다 열띤 호응을 보여주는 부산 시민과 젊은 영화 관객이 그들이다. 자원봉사 인원만 4백 명이 넘어 부족한 예산을 메워 준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 갔더니 집행위원장이 올해 관객이 20% 늘어 2만7천명이나 들어왔다고 자랑하더라. 옆에서 속으로 웃었다. 우리 영화제에는 유료 관객만 20만명이 온다. 그것도 90%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다."


칸 영화제 데어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해외영화제 집행위원장 10여 명을 이번 행사에 초청한 김위원장은 해외 인맥이 두터운 편이다.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인맥들을 구축했는지 묻자 그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내가 술을 좀 마신다. 주량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앞에 잔이 채워져 있는 것은 못 보는 성격이다. 해외 영화제에 갈 때마다 그곳 관계자들을 술로 평정했다. 내 맞수는 로테르담 영화제 집행위원장 정도다.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도로 위에 신문지를 펴놓고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외국 영화인들이 두고두고 그 일을 이야기한다." 굳이 술이 아니더라도 서글서글한 인상에 사람 좋게 처진 눈을 가진 그의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호의를 품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김위원장은 영화계에서 어른 대접을 받는 몇 안 되는 원로 중의 한 사람이다. 현장 스태프들의 경조사를 꼭 챙기는 그는 영화인들의 단골 주례 선생님이다. 하지만 그가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은 사람을 잘 챙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진면목은 영화제를 관리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는 영화에 관련된 것은 프로그래머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뒤에서 예산·행정과 관련된 악역을 도맡는다. 기획예산처 공무원을 만나 통사정을 하고 부산시청 담당자를 만나 담판하는 것 모두가 그의 몫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런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영화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김위원장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내용을 설명하며 더 많은 관객들의 참여를 부탁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목표는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을 세계 무대에 소개하는 것이다. 이 목표에 걸맞게 올해는 '신상옥 감독 회고전'을 통해 한국 영화를 재조명하고 '타이 영화 특별전'을 열어 태국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제를 소개하는 그의 모습은 영화와 함께 늙어 가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영감처럼 온화해 보였다.심오함과 섹시함
양다리 걸치기-김소희



제목이 <몬스터 볼(Monster’s ball)>이라고 해서 괴물들이 공놀이를 하거나 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영화 속에 나오지는 않는다. 원래의 뜻은 사형수가 처형되기 전날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뜻하는 속어라고 한다. 그렇다고 사형 제도가 옳은지 그른지 생각해보라는 영화도 아니니 미리 입장 정리를 할 필요는 없겠다.


<몬스터 볼>은 심오함과 섹시함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우선 심오한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이 영화는 편견이 인간을 얼마나 부패시킬 수 있는가를 끔찍할 정도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굳이 괴물과 비슷한 인물을 꼽으라면 주인공 행크의 아버지인데 인종 차별, 증오와 의심, 여성에 대한 무시, 부드러움에 대한 경멸 등으로 똘똘 뭉쳐 있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성찰 없이 평생을 살아온 노인의 영혼은 몹시 황폐해져 있다. 그 악취가 아들과 손자를 물들인다.


또 한 축으로는 피부 색깔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주인공 레티샤는 흑인이고 남편은 교도소에서 사형을 당했으며 아들은 제 한 몸 가누지도 못할 만큼 뚱뚱하다. 비만한 흑인 아이의 미래가 어떨지 뻔히 아는 레티샤가 아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이 돼지야, 그만 좀 먹어!”라고 소리 지르는 것뿐이다. 그녀 자신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에 바쁘고 점점 술에 중독된다. 이쯤 해서 행크와 레티샤가 우연히 만난다.


<몬스터 볼>을 보다 보면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레티샤처럼 늘씬하고 예쁜 여성, 행크 정도의 분위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이 그렇게 징징거리며 인생을 산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멜로 코드가 진행될수록 드라마의 심오함이 삐거덕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특히 레티샤와 행크의 정사 장면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이 영화의 의도 하나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레티샤 역의 할리 베리로 하여금 관객 서비스를 확실히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몸은 무척 멋지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무대 인사차 나선 할리 베리는 “인생의 어려움을 다룬 영화들에 대해서 할리우드는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었다. 할리우드에 대해 반감과 우월 의식을 가진 유럽 관객에게 부린 애교가 적중한 것일까. 여우주연상이 할리 베리에게 돌아갔다. 그 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받았는데 이 때 그는 “흑인 여성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74년이 걸렸다”라는 말로 또 한번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영화의 심오함은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속죄와 용서 문제인데, 행크의 비밀을 알게 된 레티샤가 어떻게 했을까. ‘정답이야 뭐 사랑 아니겠어?’라고 생각하는 분은 영화를 직접 보면서 자신의 예지력을 검증해보시는 것이 좋겠다.






어긋난 삶에 대한
연민과 응시-김봉석



흑인 여배우의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 빌리 보브 손턴과 할리 베리의 5분 간에 걸친 노골적인 정사 장면. <몬스터 볼>이 일찌감치 화제에 오른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정사 장면은 에로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남편과 아이를 차례로 잃은 레티샤는 유일하게 다정히 대해주던 행크에게 부탁한다. 나를 그냥, 기분이라도 좋게 해 줘요. 모든 것을, 삶의 목적까지도 잃어버린 레티샤는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이 자신에게 과연 남아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행크도 그 순간 알게 된다. 아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기쁘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행크와 레티샤는 다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심정은 욕정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연민과 응시다.


<몬스터 볼>은 관객을 숨막히게 한다. 이 영화에는 음악이 거의 없다. 주변이 시끄럽지도 않다. 그들의 말소리와 아주 작은 생활 소음들만이 귀를 간지럽힌다. 음악이 먼저 관객의 감정을 이끌어가는 경우도 전혀 없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몬스터 볼>을 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들도 그렇게 흘러간다. 눈앞에서 아들이 자살하고, 바로 장례식 장면으로 바뀐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마크 포스터 감독은 관객이 사건에 몰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주의 깊게 그들의 삶을 바라보기만을 원한다.


<몬스터 볼>의 인물들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 레티샤의 남편을 사형집행한 교도관은 행크와 소니 부자다. 심리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행크가 아들 소니를 폭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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