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을 지배한 '문화 코드' 10선
  • 김은남 기자 (ken@e-sisa.co.kr)
  • 승인 2001.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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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과 엽기, 자살과 허무/주류 사회 뒤집기와 변화 징후 뚜렷
엽기 · 조폭 · 허무 개그가 주류 사회를 뒤집고 조롱하는 동안 트랜스젠더와 오삼숙은 조용히 그 한켠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세기답게 온갖 변화의 징후로 충만했던 2001년,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문화 코드 열 가지를 추려 보았다.


1 조폭 증후군




자타가 공인하는 올해 최고의 문화 코드는 조폭. 조폭이 주인공인 〈친구〉가 한국 영화 흥행사를 새로 쓴 뒤, 여자 조폭(〈조폭 마누라)〉, 엘리트 조폭(〈신라의 달밤〉), 학생 조폭(〈두사부일체〉·사진)에 이르기까지 온갖 유형의 조폭이 스크린에 등장하면서 CF·뮤직비디오, 심지어 공중파 텔레비전까지 이를 뒤따르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조폭 증후군의 정점은 정치권. 대통령 아들과 조폭이 함께 휴가를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조폭과 정치인·국가기관의 연계설이 끊이지 않으면서 국민은 영화 주인공 뺨치는 이들 사이의 끈끈한 '의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2 엽기




엽기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엽기는 '올 한 해 네티즌이 가장 즐겨 찾은 검색어' 1∼2위를 차지했다. 단 엽기라는 괴이쩍은 용어가 친근한 일상어로 뿌리를 내린 것이 지난해였다면, 올해는 엽기를 상품화하는 것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엽기 토끼에 이어 등장한 엽기 가수 싸이는 엽기적인 '쌩쑈'로 온 국민을 포복 절도하게 만들더니 급기야 사생활에서도 마약 사범으로 구속되는 엽기 행각을 보여 주었다. 여름철에 개봉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 (왼쪽 아래 사진)는 관객 5백만명을 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할리우드에서 건너온 괴물 〈슈렉〉도 뱀으로 풍선을 만드는 엽기성을 과시하며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3 트렌스젠더




대학별 구술·면접 고사의 주요 예상 문제로 거론될 만큼 올해 한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문화 이슈. 연예계 트랜스젠더(성 전환자) 1호인 가수 하리수가 선풍적 인기를 얻은 데 이어 그녀처럼 남자에서 여자로 성(性)을 바꾼 중국 무용수 진싱도 내한 공연에서 상당한 관객을 동원했다. 지난해 탤런트 홍석천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가 연예계에서 퇴출된 사건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이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파격적으로 너그러워졌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른 듯하다. 하리수는 단지 1회성 호기심의 대상이며 '예쁜 여자는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신화를 강화시켰을 뿐이라는 지적 또한 만만치 않다.


4 오삼숙




전국의 '아줌마'들을 의식화한 그녀의 이름은 이제 고유 명사의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지난 3월 종영된 드라마 〈아줌마〉(사진)는 평범한 가정 주부가 이혼을 통해 자아를 찾아간다는 여성주의적 주제 못지 않게 386세대 지식인의 위선을 통렬하게 까발리는 사회 비판적 장치들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한때 장안에서는 '장진구(오삼숙의 남편)보다 못한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욕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5 홍위병




지난해 낙천·낙선 운동을 벌인 시민단체를 '현정권의 홍위병'이라고 몰아붙였던 소설가 이문열씨가 올해 언론사 세무 조사 와중에 다시 한번 그 카드를 꺼내 썼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씨 처지에서 보자면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여자 재선 국회의원은 그에게 '곡학아세하는 지식인' '야만적 지식인'이라는 폭언을 연거푸 퍼부었고, '이문열돕기 운동본부'를 자처하는 한 시민단체는 이씨의 책을 쌓아놓고 모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6 한류




현지 노동자의 석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선뜻 지불하고 한국에 날아와 "안재욱"을 연호하는 10대 중국인 소녀들의 모습은 분명 경이로웠다. 지난 2∼3년간 한국의 드라마·가요·영화가 중국·타이완·홍콩·베트남에 진출하면서 불붙기 시작한 한류(韓流)는 올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연예계는 앞다투어 한류에 편승한 국내외 공연을 기획했고, 정치권도 이른바 한류문화기획단을 조직하며 측면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의 한류 콘서트가 잇달아 관객 동원에 실패하는 등 한류(韓流)가 한류(寒流)로 바뀔 듯한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7 서캠 바이러스




'당신의 조언을 구한다'고 겸손을 떨며 인사를 건네오는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를 급습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까지 굴복시킨 이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가 입은 피해액은 10억 달러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Hi, How are you?'를 가장 공포스러운 인사말로 둔갑시킨 것 외에 이 바이러스는 인터넷으로 묶인 세계의 취약성을 폭로하는 데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8 허무 개그




남자 1 "천년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왔소." 남자 2 "더 기다려." 남자 1 "어, 그래." 뒤끝이 썰렁하기 이를 데 없는 허무 개그가 올해 큰 인기를 끌었다. '장기 불황 시대의 허탈한 현실을 희화화한 개그''대인 관계의 단절을 상징하는 개그'라는 평가를 받은 허무 개그는 다른 한편 세대를 구분하는 표징이기도 했다. 만득이·사오정 시리즈부터 이미 신세대의 유머 감각을 따라잡기 힘들게 된 기성 세대는 허무 개그에 이르러 더 이상 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렸다. 단 세 마디가 오가는 중 웃어야 할 지점이 결정 나는 아찔한 속도감 또한 기성 세대로서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9 자살 사이트




인터넷에서 만난 남남끼리 동반 자살 또는 촉탁 살인을 도모한 사건이 터지면서 인터넷의 음성적 쓰임새에 대한 비판론이 어느 해보다 무성했다. 자살 사이트에 이어 담뱃불로 몸을 지진 흔적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자해 사이트까지 등장하자 이들 '부적절한 만남의 온상'을 원천적으로 뿌리 뽑아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도 높았다. 인터넷은 단지 도구일 뿐 이들을 자살로 몰고간 것은 현실 세계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인터넷이 이들의 죽음에 촉매 역할을 했다는 사실까지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0 지방 흡입술




우리 시대 여성들에게 살 빼기는 도박이다. 여기에서 이기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지만, 지면 인생 낙오자가 될 공산이 크다. 이 판에서 승자가 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하다. 몸무게를 30kg 가까이 줄이고 나타난 개그우먼 이영자씨(사진)는 한순간 도박판의 승자인 듯했다. 멋진 남자, 돈, 대중의 갈채.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게임에서 속임수를 쓴 사실이 들통나면서 패가망신했다. 대중을 속인 그녀는 부도덕하다. 그러나 모든 여성이 도박에 중독되지 않을 수 없게끔 정도 이상의 판돈을 얹어주는 사회는 더 부도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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