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로 귀싸대기 맞은 기분”
  • 프랑크푸르트·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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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영화제 뒷얘기/독일 언론들, 일본 애니메이션 금곰상 수상에 ‘뾰루퉁’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를 정복하다.’ 얼마 전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은 이와 같은 제목으로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은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영화제측은 수상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대해 “세련되고 힘 있는 판타지이며, 일본의 정체성을 보편적인 언어로 풀어냈다”라고 상찬했다.




그러나 정작 뉴스의 진원지인 독일은 조용하다. 워낙 의외의 결과인 데다가 주인공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영화제를 찾지 않아 붙들고 얘기할 사람도 없었던 탓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행사를 밀착 취재한 독일의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은 마지막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핀잔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경쟁 부문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이미 선정위원회가 이 작품이 상을 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한 일을 굳이 입에 올리는 데서 다분히 불편한 심기가 읽힌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작품에 대한 시비라기보다는 낯선 장르에 대한 경계심이다. ‘이 작품은 논쟁할 여지없이 예쁘고, 영감이 풍부하다. 내용 또한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다. (중략) 하지만 이번 영화제에서 우리가 이렇게 ‘무더기로 귀싸대기를 맞을 만큼’ 성인들을 위한 이야기와 실제 배우들의 활약이 미미했다는 것인가?’라고 투덜대고 있다.



따귀를 맞은 듯하다는 표현은 여러 매체가 두루 동원하고 있다. <베를린 온라인>은 ‘영화제 동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언론 시사회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자들은 별로 없었다. 기자 회견장에도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스즈키는 텅 빈 의자들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 작품에 상을 안긴 것은 독일 문화계의 뺨을 철썩 때리는 일이었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베를리너 모건 포스트>는 ‘심사위원들이 용기가 있었지만, 완전한 용기는 아니었다’고 논평했다. 베를린 영화제는 전통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배려해야 할 때면 공동 수상을 타협책으로 내놓곤 했기 때문이다. 1993년 타이완의 리안 감독이 <결혼 피로연>으로 금곰상을 수상할 때에는 중국 작품이 파트너였으며, 1978년에는 심지어 세 작품이 영예를 나누어 갖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이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51년 월트 디즈니의 <신데렐라>가 바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았었다. 하지만 당시는 주요 부문이 넷으로 나뉘어 있었고, <신데렐라>는 그 가운데 하나인 뮤지컬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공연히 ‘오버’하는 것 아니냐”



이번 심사위원단의 결정에 공감하는 이들은, “영화를 본 뒤 훈훈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선 사람이라면, 장르와 상관없이 이번 결정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라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도 일부 언론이 심하다 싶을 만큼 투덜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것도 아니면서 공연히 ‘오버’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베를린 영화제는 그동안 <토이 스토리> (1996년)와 <원령 공주>(1998년)를 ‘특별 상영’해 왔다. 그런데 지난해 칸 영화제가 디지털 애니메이션 <슈렉>을 덜컥 경쟁 부문에 올렸고, 베니스 영화제도 디지털과 실사를 결합한 <웨이킹 라이프>를 불러들였다. 새로운 기술을 적극 품에 받아들이는 그들의 조처는 영화제를 훨씬 생기 있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위는 올해부터 아카데미 영화제가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을 신설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독일 언론들은 ‘하지만, 그렇더라도 대상이라니!’라는 표정이다. 특히 <타게스 슈피겔>은 ‘현실을 모방하는 리얼한 작품보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더 득세하는 것이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우려를 표했다.



작품성에 대한 평가보다 영화제의 노선을 더 염두에 두는 이러한 비평 방식은, 올해 베를린 영화제가 집행위원장이 바뀐 첫해이기 때문에 더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새로 사령탑을 맡은 디터 코슬릭이, 그동안 때로는 할리우드파로 불리고, 때로는 프랑스 영화를 과도하게 대접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모리츠 드 하델른 전 집행위원장과 어떻게 다른 노선을 보여줄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공식 표어는 ‘다양성 수용.’ 하지만 현지 언론은 표제어를 조금 다르게 뽑고 있다. 즉 전통적인 노선으로의 복귀, 독일 영화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디지털 기술 포용이 그것이다.



언론은 ‘진실의 습격’이라는 호들갑스러운 수사를 동원하면서 올해 영화제가 유난히 사회성 짙은 작품들이 많았던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1972년 북아일랜드의 시위를 소재로 삼은 <피의 일요일>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함께 금곰상을 공동 수상한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동 수상은, 두 파트너가 워낙 대조적이기 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판타지의 정점이라면, <피의 일요일>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작품. 어떻게 하든 할리우드로부터 거리를 둔 채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영화제측의 고심이 읽힌다는 것이 중평이다.



한편 일본에서 수상식을 가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나이에 그걸 좋아해야 하겠는가. 국제 영화제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에 가지도 않았다”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미 홍콩과 타이완에서 개봉했고 오는 7월 말 국내에서도 선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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