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비폭력 저항 전통 있다”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2.09.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노자 교수 서면 반론/서유럽 폭력성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사회비평> 가을호에서 김진석 교수는 문부식씨와 더불어 박노자 교수(노르웨이 오슬로 대학·한국학)를 비판의 도마에 올렸다. 김교수는 안티 조선 문제 등에서 보여준 박교수의 비판적 열정을 존중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미 ‘세계 시민적 영향력을 지닌 귀화 한국인’인 그가 ‘(문부식 류의) 위험한 근본주의’를 퍼뜨리고 있다고 판단해 본격 비판을 시도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한 박교수의 반론을 서면으로 받아 보았다.


김진석 교수는 당신이 폭력적인 역사의 와중에 폭력적인 구조(군대·유교적 위계 질서 등)에 몸 담을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실존적 고민을 무시하면서, ‘도덕주의적(혹은 종교적) 근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들을 비겁자 혹은 생각 없는 군사주의자로 매도하는 ‘배타적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병영 국가에서 군대에 끌려가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는 국가의 폭력이지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권위주의 국가 자체가 이미 반성과 부정의 대상이 된 1980∼1990년대 초기에 권위주의의 근본 심성인 근대적 폭력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점은-비록 상황 논리로 이해가 되지만-안타까울 뿐이다. 파쇼 국가의 원수를 ‘살인마’로 보면서도, 그 살인마의 주요 살인 도구인 군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개혁의 논리로서는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당신은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들의 응원에서 ‘파시즘적 광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교수는 스포츠라는 경쟁적 장에서 발휘되는 민족적 열기까지 모두 파시즘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그 또한 파시즘적인 발상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월드컵 기간에 경희대에서 머무른 일이 있었는데, 피켓을 들고 있는 경희대병원 노동자들의 피로한 얼굴들을 보면서 도저히 뭘 즐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두들겨맞는 외국인 노동자, 주인의 괄시에 신음하는 병원 파업 노동자, 철거 폭력에 생존권을 잃은 노점상, 그들의 모든 비극을 잊고 자본과 국가가 ‘해준’ 대형 행사에 정신을 파는 것이 좌파의 도덕인가?
김교수는 당신이 서유럽적 근대성을 잣대로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을 비판하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유럽적 근대성이라는 것 자체가 제국주의적 약탈의 바탕 위에서 성립 가능했던 측면이 있는데도 주변부 국가가 이에 대항해 방어적 민족주의를 구축해 온 것까지를 무조건 폭력적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김교수가 지적한 대로, 서유럽적 근대야말로 전례 없는 폭력성을 발휘해 세계사를 왜곡한 장본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폭력성의 희생자가 된 주변부 지역일수록, 오히려 서유럽적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서 부정하는 것이 순리일 것 같다. 이미 다들 잊은 일이지만, 식민지 조선의 많은 민족주의자들에게 1930년대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거의 ‘성인’이었다. 예컨대 한용운의 간디관이 그랬는데, 그 원인이 바로 역사의 희생자로서 서유럽적 폭력성을 부정한 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한국 사회를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일련의 역사적 불행-일제 말기의 파쇼화, 6·25, 군사 독재-을 거치고 난 뒤 한국 민족주의가 비폭력에 대한 초기의 고민을 잃어버리고 많이 거칠어진 데에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사학자로서 추구하는 것이 조소앙이나 안창호, 한용운과 같은 초기 선각자들의 비폭력 담론을 다시 한 번 살리는 것인데, 이는 ‘서유럽적 잣대’와 다소 무관한 생각들이다.


‘모든 폭력은 거부돼야 한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극우 세력의 주장과 통한다.
한국 극우들은 그들과 전혀 무관한 담론들을 이용하는 데 고수들이다. 한국의 극우주의는 그래야 할 만큼 그 자체가 이념적으로 빈곤하다. 그러나, 비폭력적 저항 논리와 극우들의 폭력적 헤게모니 논리는 그 성질상 완전히 이질적이다. 근대적 폭력의 근원이 바로 극우들의 국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