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극장가 수준작 소개
  • 전찬일 (영화 평론가) ()
  • 승인 1997.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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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방학 대목의 극장가에 한국 영화가 세 편이나 등장해 눈길을 끈다. <고스트 맘마>(한지승 감독) <깡패수업>(김상진 감독) <미지왕>(김용태 감독). 낯선 신예들이 연출했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코믹 터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뚜렷한 개성과 평균작 이상의 수준을 갖추었고, 각기 서울에서 가장 입지 조건이 좋은 피카디리·명보·단성사 극장을 중심으로 상영될 뿐만 아니라, ‘빵빵한 외화’들 틈에서 버거운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응원을 받고 있다.

한국에 진출한 5개 직배사는, 연소자 관람 불가인 우리 영화들과 달리 등급 면에서 유리한 이점을 안고 야심작들을 선보인다. 뉴저지에서 맨해튼을 잇는 거대 하저(河底) 터널에서 펼쳐지는 패닉 서스펜스 <데이라이트>(중고생 가). 실베스터 스탤론의 영웅담을 그린 스펙터클 재앙 영화다. 61년 인기를 끌었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실사 극영화로 탈바꿈시킨 가족물 <101 달마시안>(연소자 관람 가). 점박이개들의 열연과 모피광 악녀 크루엘라(글렌 클로즈)의 카리스마가 흡인력이다.

디즈니와 정면 대결을 벌일 또 하나의 가족 영화 <스페이스 잼>(연소자 가). 벅스 버니, 트위티, 데피 덕 등 워너브라더스 만화 캐릭터와 미국 프로 농구 NBA의 슈퍼 스타 마이클 조던을 등장시켰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처럼 신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했는데, 드라마는 좀 떨어지지만, 컴퓨터그래픽까지 가세한 특수 효과와 음악 등이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이밖에도 관객을 잔잔한 감동으로 이끌 <아름다운 비행>(연소자 가)과 포스트모던 스타일로 환생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고교생 가), 살인 사건이라는 전형적 미스터리를 숨막힐 듯이 빼어난 형식미로 펼쳐보인 피터 그리너웨이의 장편 데뷔작이자 출세작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과 ‘바로 그 영화’<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이 연말 연시 흥행 시즌에 찾아온 화제작들이다.고스트 맘마
한지승 감독. 최진실 김승우 주연.

최진실을 한국판 데미 무어로 꾸며 여성 관객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자는 것이 흥행 전략이다. 그렇다고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엄마 없는 하늘 아래>처럼 눈물만 쥐어짜는 최루물은 아니다. 희극적 캐릭터와 상황을 통해 웃음을 적절히 포진시켰다. 감독은 절제의 미덕을 알고 있다.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내(최진실)를 잊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남편(김승우). 어느날 아내가 유령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마음을 돌려 새 삶을 찾아주기 위해서다. 비록 사랑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남편과 대화도 할 수 있고 만질 수도 있는 유령 아내가 택한 전술은 인간의 질투. 질투하는 인간적 유령의 모습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최·김 커플의 연기가 만족할 만하다. 우여곡절 끝에 새 아내가 되는 박상아의 어리숙한 캐릭터와 연기 해석도 매력적이다. 특히 조연 권해효가 빛난다. 다가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카메라도 제법 효과적이다. 그밖에 컴퓨터 그래픽을 자제한 것이나, 약방의 감초 같은 섹스신을 남용하지 않은 연출력도 인상적이다.

깡패수업
김상진 감독.박중훈 박상민 주연.

박중훈·박상민 콤비가 일본 야쿠자 세계를 무대로 액션과 우수 어린 웃음을 동시에 선사하는 코믹 액션 버디 무비. 상반된 처지에서 변화하려고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두 사내의 우연한 만남, 우정과 의리를 담담하게 그렸다. 장군의 아들 박상민이 간혹 웃음을 유발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액션물이면서도 지나치게 액션 연출에 치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호감이 간다. 캐릭터의 인간적 면모를 그리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담담한 미덕은,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인간사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인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문제 의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코믹 이미지로 굳은 박중훈이 시종일관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나와 오히려 희극적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외에 일본 로케 촬영이 99%이고 대사도 거의 대부분이 일본어여서 이국성이 느껴진다는 것, 잔인하다고 소문난 야쿠자 조직이 너무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나 하는 것 등이다.
아름다운 비행
캐럴 발라드 감독. 안나 파퀸 주연.


열세 살 소녀와 야생 거위 16마리 사이의 우정과 사랑을 묘사한 동화 같은 이야기. 우연히 발견한 거위알들을 부화시켜 자식처럼 키우고, 마침내는 아버지가 만든 경비행기를 몰아 따뜻한 남쪽 보금자리로 무사히 옮기는 에이미 역은 열두 살인 안나 파퀸이 맡았다. 안나 파퀸은 94년 <피아노>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영화의 매력은 따라서 안나의 열연을 지켜보는 데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안나 파퀸 영웅 만들기? 아니다. 그 이상이다.

대형 거위 비행기를 비롯해 글라이더 5대를 이용하고 캐나다산 거위 60마리를 교체해 가며 촬영한 절묘한 비행 장면, 주제가 <만 마일>을 포함한 사운드 트랙, 교통 사고로 엄마를 잃고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겪는 사춘기 소녀의 방황과 성장을 둘러싼 드라마, 그리고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는 주제 등 한마디로 감동과 재미와 교훈을 두루 갖춘 아름다운 영화다.

로미오와 줄리엣
바즈 루어만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최근 할리우드에 강하게 불고 있는 셰익스피어 열풍의 결정판. 파격적 해석이 돋보였던 <리처드 3세>에서는 이안 맥컬린 경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명인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연극 배우가 주인공 역을 맡은 것과는 달리, 인기 절정의 청춘 스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몬테규가의 로미오를, <작은 아씨들>에서 베스로 나왔던 클레어 데인즈가 캐퓰릿가의 줄리엣을 연기했다. 캐스팅에서 이미 그 방향성이 명백해진다. 겉멋과 속도감을 그 특징으로 하는 신세대 풍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줄거리는 원작을 따르고 대사 역시 충실했으나, 보스니아 내전 등 온갖 혼란이 암시되는 현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비장한 러브 스토리는 현란한 미장센과 의상, 촬영, 감각적인 음악, 과장된 연기, 최신식 스포츠카와 패션총 따위 소도구로 치장한 채 워낙 빠르게 전개되어 마치 장편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한다. 여러 모로 <리처드 3세>와 비교될 만하다. 그러나 이만큼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파격만큼의 깊이가 전달되지는 않는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말론 브랜도 주연.


72년 10월14일 뉴욕 영화제에 첫선을 보인 이래 2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치열한 작가성과 문제 의식을 지닌 예술 영화라는 극찬과 섹스 강박관념으로 이루어진 포르노라는 극단적 평가 사이를 오간 문제작 중의 문제작. 막 아내를 여읜 40대 중반 남자와 애인 있는 열아홉 여자가 우연히 만나자마자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줄곧 동물적인 성에만 탐닉한다는 설정이나, 여배우의 체모가 거침없이 드러나는 노골성 등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둘러싼 논란의 요인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파국을 맞이하지만 섹스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 관계의 의미망과, 그 관계 속에서도 고독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사내의 정신적 황량함, 벌거벗은 육체를 직시해 관객의 훔쳐보기 욕망을 드러내고 해체시키는 카메라의 시선 등인데, 여기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해독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울러 장 뤽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 장 비고의 <라틀랑트> 등 위대한 선배들의 영화에 대한 인용과 참조, 조롱을 찾아보는 것도 영화 보기의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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