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영화 새 젖줄 ''광화문 밸리''가 뜬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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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테크 서울 · 아트큐브 등 잇달아 둥지 틀어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멀티 플렉스가 한국 영화계의 열쇠말이 된 지 오래다. 영화도 극장도 덩지로 경쟁하는 시대에, 그 비좁은 틈새를 메우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그 기운은,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서 움트고 있다.

지난 11월18일 개관 영화제를 가진 시네마테크를 시발로, 오는 12월3일에는 시네큐브가 개관한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진흥위원회도 바로 그 맞은편에 시네아카이브를 짓는 것을 놓고 논의 중이다. 바야흐로 ‘광화문 시네 밸리’가 뜨는 것이다.

흐름을 주도하는 면면을 보면 기운 자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시네마테크서울은 영화 전문지 <필름 컬쳐>의 임재철 주간과 스태프가 주축이며, 시네큐브 기획자는 영화사 백두대간을 통해 예술 영화를 배급해온 이광모 감독이다.

시네마테크서울은 지난 11월18일 ‘오슨 웰스 회고전’(12월1일까지)을 열며 첫 발을 내디뎠다. 정동에 들어선 복합관 ‘정동 스타식스’ 여섯 관 가운데 하나를 임차해 영화제를 치르고 있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오슨 웰스의 대표작을 무더기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는 점을 반가워했다. 개관 행사에 참석한 이창동 감독은 ‘가난하지만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축하했고, 홍상수 감독도 자리를 함께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 임재철씨는, 시네마테크를 구상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1998년 영화 전문지 <필름 컬쳐>(한나래출판사)를 창간한 뒤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몇몇 동료와 함께 ‘필름 컬쳐 영화제’(1998년) ‘루이 브뉘엘 영화제’(1999년) 등을 마련했다. 그의 수공업적인 노력 덕분에 타이완과 일본의 문제작, 프랑스의 고전 영화 등이 일반 관객에 선보였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영화계는 열악하다 못해 황폐하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나 한국 영화가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풍토인 데다가, 덩지에 연연하기는 영화업자만이 아니다. 3개나 되는 국제 영화제를 꾸리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이들이 고전을 볼 시네마테크 하나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고전을 모르니, 동시대의 문제작을 가려낼 안목을 갖춘 이도 드물다. 맥락을 공유하는 데 가장 시급한 것은 영화 전문지와 시네마테크다. 그동안 나온 영화 잡지의 수가 다섯 손가락을 넘겼고, 고전 비디오를 빌려 볼 수 있는 곳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장에서 승부하는 대중 잡지는, 자기도 모르게 산업 논리를 실어 나르는 업계 소식지로 전락하기 십상이었고, 그동안 영화광들의 갈증을 달래주었던 ‘유사 시네마테크’는 조악한 비디오 화면과 엉성한 자막으로 영화를 반쪽으로 만든 구석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상업 영화 만드는 데 정부가 왜 돈 내나”

무엇보다 그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문학적 허영심’이다. “100명의 문학 청년 속에서 한 명의 제대로 된 작가가 나오듯이 100명의 시네필이 있어야 한 명의 제대로 된 감독이 나온다. 감식안 있는 관객이 없으면 어쩌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나와도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나아가 그는 이렇게 꼬집는다. “할리우드를 예외로 둔다면, 한국은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모든 영화사가 갖고 있는 유일한 나라다.” 그는 이른바 영상산업지원책의 방향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영상산업을 미래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여기는 정부의 태도가 그 착각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데 정부가 돈을 지원할 이유가 있는가. 정부는 시스템을 정비하고, 시장이 보살필 수 없는 영역에 관여해야 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시네마테크가 시장의 지원을 받는 곳은 없다고 말하는 그는, 공공 부문의 지원과 소양 있는 관객의 애정을 기대하고 있다. 시네마테크서울은, 현재 서울시와 문화관광부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다. 상설관을 갖추고 자료관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런 여건이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다가는 영영 시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그는, “비록 행사 때마다 극장을 임차하는 방식이지만 극장측과 의견 조율이 잘 되고 있어 큰 문제는 없다”라고 말했다. 시네마테크서울은, 앞으로 일본의 명감독 오즈 야스지로 영화제, 1950∼1960년대 한국 영화제 등을 준비하고 있다.

광화문에 새로 들어선 흥국생명빌딩 지하에 둥지를 튼 이광모 감독은 예술 영화 전용관(동숭시네마텍)을 운영해 본 경험을 자산으로 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자평한다. 1990년대 중반 영화에 대한 유례 없는 관심 덕에 예술 영화 전용관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예술 영화에 걸맞는 적절한 유통 방식을 찾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관객이 많지 않은 영화를, 상업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개봉한 것을 실책으로 꼽았다. 고작 1∼2개 관에서 개봉하면서 홍보비는 수십개 관에서 개봉하는 영화와 비슷한 규모로 쓰다 보니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그는 이원화 전략을 세웠다. 12월3일 개관하는 2백93석 규모 씨네큐브는 독특한 감각의 대중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으로, 지난 10월부터 가동한 78석 규모 아트큐브는 수지와 상관없이 다양하고 실험적인 영화가 유통되는 공간으로 차별화한 것이다. 따라서 대안 공간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트큐브다. 극장은 작지만, 비디오에서부터 35mm 영화까지 모두 상영할 수 있는 영사 시설을 갖추어 소규모 영화제나 세미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신 시네큐브는, 예술적인 감각의 대중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앞으로 1년 동안 상영할 목록도 이미 정해 놓았다. 칸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 수상작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바흐만 고바디), 올해 베니스 영화제 대상작 <순환> (자파르 파나히)을 비롯해 이탈리아의 파졸리니 감독과 영국의 켄 로치,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 일반 상영관에서 접하기 힘든 개성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여건도 좋은 편이다. 건물주인 태광측으로부터 극장 2개 관을 15년간 무료로 임차했으며, 영사기사 2명을 포함해 극장 관리에 필요한 경비와 인건비 일체를 태광이 부담한다. 여기에다 일주문화재단으로부터 매년 1억5천만원씩을 5년 동안 제공받는다.
국내외 희귀 영상 자료도 ‘풍성’

이광모 감독이 극장 운영이라는 번거로운 일에 다시 손을 댄 것은, 태광측의 성의에 신뢰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당초 1개 관만 지었으나 기획을 맡은 공공미술집단 ACS가 1개 관을 더 짓자고 제안했고, 태광측이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또 공사가 마무리 단계였던 시네큐브도 이 감독의 말 한마디에 공사를 다시 했다. 앞 사람 때문에 시야가 가릴 염려가 있다고 말하자 두 말 않고 바닥을 스타디움 식으로 뜯어고친 것이다.

일반인이 자료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미디어 갤러리와 아카이브도 또 하나의 자랑거리다. ACS가 기획을 맡은 이 곳은 국내외 희귀 애니메이션·다큐멘터리·비디오 아트 자료를 비치하고 누구나 무료로 열람, 혹은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지하에 마련된 디지털 편집실은, 극장을 생산적인 공간으로 바꾸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누구나 자신이 찍은 비디오 필름을 들고 와서 편집할 수 있으며, 작업을 도울 수 있는 전문가가 상근하면서 아마추어 영화 작가들을 돕는다.

감독인 그에게 극장 운영은, 너무 긴 외도가 아닐까. 대답이 의외다. 감독은 직업이 될 수 없으며 하고 싶을 때 작업할 수 있으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조차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절>이 상을 많이 받았으니 일하기가 수월해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명일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신은 결코 시장에서 환영받을 수 없으며 스스로 작업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는 말이다. 그는 “관객의 폭을 넓히는 일이, 나의 작업 여건을 좋게 만드는 일이다”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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