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휩쓰는 한국어 배우기 열풍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4.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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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각국, 한국어 배우기 열풍…정부 체계적 지원 뒷받침되어야
오는 10월9일 한글날, 영풍문고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일본 최고 인기 스타 중 한 명으로 인기 그룹 스맵의 멤버 구사나기 쓰요시(한국명 초난강)가 자신의 책 <정말 Book> 홍보를 위해 독자와의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정말 Book>은 구사나기가 자신이 한국어를 배운 경험을 토대로 쓴 한국어 교재로 일본에서 40만부 이상 팔려 어학책 판매 사상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기록한 책이다.

일본 최고 스타가 어떻게 한국어 교재를 쓰고, 그 책이 어떻게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면 한류 붐에 힘입어 한글이 어떻게 세계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 또한 구할 수 있다.

초난강의 한국어 사랑은 남다르다. 후지TV에서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소개 프로인 <초난강 쇼>를 진행하는 그는 얼마 전 한국어로만 제작된 일본 영화 <호텔 비너스>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호텔 비너스>는 <초난강 쇼>를 제작한 스핀오프 사가 기획한 영화로, 사실상 이 영화의 기획자는 초난강 자신이다. 이로써 초난강은 한국어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켰다.

초난강과 함께 <호텔 비너스>에 주연으로 출연한 나카타니 미키 역시 한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 배우다. <링>과 <링2>의 성공으로 스타덤에 오른 나카타니는 한국 영화 <역도산>에도 캐스팅되어 역도산(설경구 분)의 애인으로 출연한다. 그룹 V6 또한 한국 진출을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초난강의 성공으로 스맵의 다른 멤버 1~2명도 한국 진출을 꾀하고 있어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 연예인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신인 그룹 도쿄에스뮤지카의 멤버들과 여고생 가수 마이 등이 한국 진출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 진출을 위해 일본어를 배우던 것과 상황이 완전히 역전한 것이다. 일본 스타들이 한국어에 기울이는 관심을 통해 한국어가 아시아의 문화어로 자리 잡아 가는 양상이 확인된다.

대중 스타뿐만이 아니다.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대중 문화 콘텐츠 전반에 스며들고 있다. 지난해 말, 도쿄 시부야 광장의 한 빌딩 광고 전광판에는 한복을 입은 보아의 모습이 등장했다. 일본 팬들에게 세배하는 보아 모습 아래에는 한글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글자가 찍혔다. 일본 최고의 아이돌 스타 우에토 아야는 배용준과 함께 일본 오오쓰카 제약의 오로나민C 광고에 등장해 한국어로 제품을 선전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점점 한국어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지난 여름 방영된 후지TV 간판 드라마 <도쿄만 풍경>에서는 일본 드라마 최초로 재일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일본의 최고 인기 스타인 나카마 유키에와 나카무라 수스케가 출연해 화제를 모은 이 드라마에는 <겨울연가>로 일본에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박용하도 출연했다. 한국 가수 ‘일기예보’와 ‘자전거를 탄 풍경’이 드라마 주제가와 삽입곡을 불렀다. 이 외에 재일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된 진창현씨의 삶을 다룬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이 특집 드라마로 편성되는데, 초난강이 주연을 맡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재일 한국인 최양일 감독이 연출하고 일본 최고의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가 출연하는 <피와 뼈>, 이즈쓰 가즈유키 감독이 연출한 <박치기>도 재일 한국인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다.

한국어에 대한 대중 스타와 대중 매체의 관심은 한국어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관심을 반영한다. <겨울연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한국어 붐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국어를 배우려는 일본 주부가 늘면서 큰 서점은 한류 스타를 표지 모델로 내세운 한국어 대본을 판매하기 위해 특별 판매대를 두기도 했다. 영어를 제외한 외국어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로 떠오르면서 NHK는 한국어 교재 판매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일본에 진출해 한류 전도사가 되었던 탤런트 윤손하는 릿교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한국어가 한류 문화를 대표하는 코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한류가 퍼진 아시아 나라에서는 어디에서든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류 열풍이 거센 몽골과 베트남에서는 관광객에게 한국어 사인을 해달라고 할 정도로 한글의 인기가 좋다. 한국 드라마 마니아가 많은 타이완에서는 한국어 대본을 외우는 것이 유행이 될 정도다.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는 <엽기적인 그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 한국 영화 제목을 그대로 새긴 티셔츠를 입고 있는 청소년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중국 네티즌들은 한류 스타 안재욱과 채림이 함께 출연하는 드라마 <오 필승 봉순영>에 대한 소식을 알기 위해 한국 사이트를 드나들고 있다. 특히 <리니지2>나 <라그나로크> 등 한국 인터넷 게임에 빠진 중국 네티즌들이 게임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 게임 전문 케이블 방송을 시청하거나 게임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방문하면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물론 한국어에 대한 아시아 각국 젊은이들의 관심이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국내에서도 홍콩 영화가 유행할 때 영화 주제가를 중국어로 따라 부르는 현상이 있었고, 1990년대 초반 일본 만화가 유행할 때 일본어를 배우려는 청소년이 갑자기 늘어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평가는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이보다는 깊다는 것이다.

이는 해마다 한국어능력시험 신청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과 재외 동포를 대상으로 치러지는 한국어능력시험은 지난해 지원자가 1만2천백87명이었다가 올들어 1만7천5백31명으로 44%나 급증했다. 응시자 수는 일본인이 6천1백85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국인(2천7백37명)과 베트남인(6백58명)은 전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교육인적자원부 박상화 연구사는 “시험이 아직 정착 단계이기 때문에 한국어능력시험 성적의 효용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시자가 이렇게 갑자기 늘어난 것은 한류 영향으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라고 분석했다. 한글학회가 주관하는 세계한국말인증시험 역시 지원자가 늘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 급격히 번지고 있는 한국어 열풍을 잇기 위해 정부가 뒤늦게 지원에 나섰지만 아직 한국어 세계화를 위한 인프라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상태다. 문화관광부가 1998년부터 올해까지 한국어해외보급사업을 위해 투입한 예산은 고작 31억원이었다. 교재 개발도 미흡해서 기초 과정 교재는 넘쳐나는데 중급이나 고급 교재는 태부족이다. 한국어 세계화 관련 부서가 부처 별로 분산되어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이와 관련한 업무는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어세계화재단,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교류재단과 재외동포재단,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국제교육진흥원으로 나뉘어 있다. 한국어세계화재단 오광근 연구원은 “효과적인 한국어 세계화를 위해서 총괄하는 부서를 두고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아시아의 문화어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한국어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초난강의 사례를 보면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초난강은 일본 스타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한류를 받아들인 축에 속한다. 영화 <쉬리>에서 한석규의 열연에 매료된 그는 한국 영화 마니아가 되었다. 일본 최고 인기 스타인 그가 꼽는 자신의 소망은 바로 한석규와 함께 영화를 찍는 것이다. 한류를 먼저 받아들이고 한국어를 미리 공부한 덕분에 초난강은 자신의 부가 가치를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초난강이 속한 그룹 스맵 멤버 중에는 나카이 마사히로와 기무라 다쿠야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 그러나 한류와 한국어로 탄력을 받은 초난강은 2003년 나카이 마사히로와 기무라 다쿠야를 제치고 스맵 멤버 중 최고의 소득세를 내는 연예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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