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 잘 붙이고 싸움도 잘 말린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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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
지난 8월 ‘내 둘째딸은 한국산’이라는 말로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을 강조하며 공식 업무에 들어간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대사의 거침 없는 행보에 한국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9월17일 그는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이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미국측에 일종의 ‘원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당수 한국인들에게는 파격적이고 용기 있는 일로 비쳤다.

지난 11월 힐 대사는 ‘카페 유에스에이’라는 인터넷 카페 문을 열었다. 특정 계층이 아닌 한국의 일반인을 상대로 한다는 점에서, ‘콧대 높은 나라’의 대사가 직접(물론 통역 담당 직원의 도움을 받는다) 채팅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 이벤트는 호감을 사기에 족했다.

그런 그가 지난 12월16일에는 업무 협의차 본국에 들어갔다가 아시아소사이어티가 주최한 한 모임에 참석해 주목할 만한 발언을 쏟아냈다.

첫째, 최근까지 논란을 빚어온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 11월 로스앤젤레스 연설을 두둔하고 나섰다. 노대통령은 당시 “미국과 얼굴을 붉혀야 할 때는 붉히겠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고집하는 데에는 그쪽 나름의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라고 발언했다. 이를 두고 ‘한·미 갈등’ 어쩌고 하며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는 일부 언론도 있었다. 힐 대사는 이 날 강연에서 “연설문을 읽어봤더니, 전체 맥락에서 미국 입장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둘째, 힐 대사는 그러면서도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에 할 소리는 하겠다고 밝혔다. “인권 문제는 북한 내정 문제가 아니므로, 한국 정부에 이를 강력히 제기하겠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시아소사이어티에서 힐 대사가 이처럼 말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한국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소속 한 국회의원에 의해 ‘한·미 동맹의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비밀 문건이 폭로되어 정계가 온통 시끌시끌하던 터였다. 당연히 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크리스토퍼 힐 대사는 노련하게 빠져 나갔다.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재배치 등 현안이 산적한데, 이 문제를 말하는 것은 시기 상조’라고 못박은 것이다.

분쟁·혼란·체제 변화 처리 전문가

주재국에서 자국의 이해를 대표하는 대사의 처지는, 어찌 보면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뜯어 말려야 하는’ 거간꾼과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토퍼 힐 대사의 거간꾼 노릇은 아직까지는 별로 흠 잡을 만한 구석이 없다.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들은 힐 대사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 ‘대단히 의욕적이며, 찬밥 더운밥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일 욕심이 많으며,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취임 초기여서 ‘단독 회견’ 등 국내 언론과의 접촉에 대해서는 신중한 편. 대사관 직원에 따르면, 이미 공식 업무를 시작하기 전부터 밀려든 인터뷰 요청 명단이 A4 용지로 몇 장이나 쌓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를 ‘콧대 높다’고 비난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힐 대사는 이렇다 할 화려한 명성 없이 국무부 말단에서 출발해 대사에 오른 인물이지만, 그의 일선 경력은 결코 허투루 보아 넘길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전후 50년간 지속된 냉전 체제가 무너지던 1989년 그는 미국 국무부 폴란드담당관실에서 일했다. 같은 해 폴란드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는 격변이 있었다.

이 외에도 그는 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마케도니아·코소보 등 새뮤얼 헌팅턴이 말한 이른바 ‘문명의 단절선’ 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1980년대 중반 그가 일했던 한국 역시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분쟁·체제 변화·사회 혼란 등을 처리하는 데 관한 한 1급 실무자인 것이다.

힐 대사는 2000년부터 폴란드 대사로 일하면서 이라크에 대한 폴란드의 파병을 이끌어내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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