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속 성차별, 해도 너무한다
  • 고갑희(한신대 교수·영문학) ()
  • 승인 1999.10.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재벌 기업의 광고 문구에 따르면, 여성들의‘천국’이란 성형 수술과 결혼을 해야 하며, 해킹의 걱정으로부터 배제된‘천국’이다. ‘새 기술, 새 생각, 새로운 미래’를 강조하는 이 회사가 가부장제 이데올로
며칠 전 어느 일간지에 한 회사의 카드 광고가 전면에 실려 눈길을 끌었다. 약간 벌어진 입, 하얀 얼굴, 긴 머리를 한 탤런트 이영애의 매혹적(?)인 모습이 카드 2장을 들고 있다. 이 광고에 눈길을 주게 된 것은 성별 구분을 확연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신세대에게 이 카드를 바친다!’는 전체 광고 카피와 함께 카드는 ‘여성 천국―○○ 레이디 카드’와 ‘남성 특권―○○2030 카드’로 나뉜다. 여성에게는 ‘레이디 카드’를 남성에게는 20∼30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2030 카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성별로 나뉜 세부 항목 분류를 살펴보면, ‘여성 천국’이라 이름 붙인 여성에게 제공되는 혜택 항목은 극장·쇼핑·놀이·웨딩·대출·보험·자동차·사이버로 나뉘어 있고, ‘남성 특권’ 난의 혜택은 영어로 적혀 있었다(cinema, man only, theme park, cyber, internet, insurance, car, card loan).

얼핏 보아 한국어와 영어로 나뉜 것말고는 거의 차이가 없는 듯했다(남성들에게는 영어를, 여성들에게는 한국어를? 여성은 민족주의자가 되고 남성은 세계화?). 여성 항목에도 자동차·보험·대출이 있고, 사이버도 있으며, ‘남성 특권’에 부여된 극장·놀이 항목도 똑같이 할당되어 있다. 택시를 타면 으레 앞에 가는 여성 운전자 차에 대고 ‘여자가 재수 없이’ 혹은 ‘집에 있지 차는 끌고 나와 가지고’라는 말을 듣게 되며, 남성에 비해 여성 컴맹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는 시점에서, 여성과 사이버를 연결짓는 이 광고를 보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살펴보면 여성과 남성이 다른 점들이 드러난다. 여성은 광고 카피에 나타나는 ‘신세대’와는 상관없이 레이디로 불리고, 세대를 나타내는 숫자는 남성에게 주어져 있다(그런데 현재 20~30대 여성이 ‘레이디’가 되고 싶을까). 그리고 여성 쪽에는 쇼핑·웨딩이 분류항으로 들어가 있고, 남성에게는 남성만의 세계, 인터넷(man only, internet)이 들어 있다. 이 분류항들을 설명하는 세부항들을 보면 여성에게는 결혼과 외모가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레이디 카드’에는 ‘결혼 정보, 혼수·웨딩드레스·미용·신혼여행 할인’ 혜택이 ‘웨딩’ 항목에 들어 있고, ‘대출’ 항목에서도 ‘결혼 자금 최고 1,000만원까지 대출’로 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에 대한 ‘대출’이 ‘직장인을 위한 부담 없는 대출’인 점과 대조적이다. 그리고 ‘보험’ 항목에도 ‘레이디 성형보험 무료 가입’이 들어 있으며 ‘상해 사고로 인해 얼굴 피부에 1㎝이상 영구적’ 상처가 있으면 ‘성형수술 비용 최고 1,000만원까지 보상’해 준단다. 남성에게는 ‘전자 상거래 안심보험 가입’으로 해킹 피해를 당했을 때의 보상액이 적혀 있다. 이 광고에 따르면 ‘남자들만의 세상이 있다’. 그리고 여자들은 ‘쇼핑’을 하며 레이디 카드를 사용하면 ‘쇼핑이 한결 가벼워진다’. 남성에게도 쇼핑할 기회는 주고 있다. 다만 남성의 쇼핑은 사이버 쇼핑으로 제시된다. 직장일로 바쁜 남성이 언제 백화점에 들르겠는가, 사이버 쇼핑몰에 들려야지.

여성 모델 이용해 ‘남성 특권’ 강조

이와같이 이 광고는 전형적인 성 구분을 한 셈이다. 남성들만의 세계는 있는데 여성들만의 세계는 없고, 여성에게 결혼과 성형 수술은 필수인 것으로 제시되고, 남성은 테크놀로지와 더 관련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대한민국 20∼30대 남성은 결혼하지 않던가? 여성에 대한 대출은 왜 ‘결혼 자금 걱정 끝!’을 위한 대출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여성 천국’에는 ‘직장인을 위한 부담 없는 대출’ 항목이 없는가?

‘새 생각, 새 기술, 새로운 미래’라는 이 회사의 광고 카피에도 불구하고 이 광고는 전혀 새롭지 않다. 증권·정유·전자·생활용품을 겸하는 현대적 테크놀로지를 대표하는 회사의 광고가 새로움이라는 외피를 쓴 채 여전히 기존 성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다. ‘새로운 기술’이 여성과 남성을 구태의연하게 구분하지 않는 사회를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재생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낡은 생각이 새로운 미래를 낳을 수 있을까? 여성 모델의 섹시하면서 청순한, 그러나 약간 맹해 보이는 이미지를 전면에 부각하는 이 광고의 카드는 ‘남성 특권’을 위한 것인 듯하다. 여성들의 천국이란 성형 수술과 결혼을 해야 하며, 해킹의 걱정으로부터 배제된 천국이다. 남성에게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 새로운 미래란 어떻게 올 수 있을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