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잘못을 고치는 용기 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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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7.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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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3월로 예정된 개정 노동법 시행을 유보한 다음 노동법 개정 논의를 ‘노개위’에서 다시 출발하거나, 국회에서 야당과 함께 재개정해야 한다.”
파업과 그것을 둘러싼 공수(攻守) 양측의 힘 겨루기 양상이 여간 극적이지 않다. 생존권 수호 차원에서 ‘악법 철폐 투쟁’을 벌이는 노동자와 ‘민주주의 수호 투쟁’에 나선 지식인,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바닥인데 파업까지 겹쳐 손해가 막심한 기업인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부. 당사자들로서는 이런 총체적 난국에 무슨 연극 타령이냐고 윽박지를지 모르지만, 제3자의 처지에서 보건대 이번 파업 정국은 확실히 예전과 다른 관전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노동자들은 ‘사상 유례 없는 총파업’과 ‘징검다리 파업’에 이어 ‘수요일 파업’ 등 보여 줄 것은 다 보여 주는 변화 무쌍한 전술을 펴고 있다. 최대한 여론을 업고 가려는 유연한 파업 전술이다. 자본의 논리가 들고 나온 ‘노동 시장의 유연성’에 맞선 ‘파업의 유연성’ 전략이다.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가 텔레비전 토론을 제의했다가 민주노총의 기습적인 역제의로 궁지에 몰린 것도 극적 반전이다. 김수환 추기경까지 조건 없는 텔레비전 토론을 주문하며 노동자들을 거들고 나서는 통에 공당의 대표가 까딱수를 썼다가 응하지도 무르지도 못한 채 슬며시 장기판을 뜨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정부보다 한 발짝 앞선 노동계의 이른바 국제 연대 투쟁이라는 것도 눈부시다. 국제 노동단체의 1차 항의 방문단에 이어 2차 항의 방문단이 내한해 파업을 지지하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등으로 정부가 깔아 놓은 국제화·세계화의 레일을 노동자들이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양상은 그만큼 노동자들의 인식 틀이 바뀌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노동자들은 87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 때 뼈아픈 패배를 경험한 바 있다. 재야·학생·시민사회가 싸워 얻어낸 ‘6·29 항복’ 이후에 펼쳐진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끝내 대규모 파업이 불러온 중산층의 경제 위기 불안 심리를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 국면을 ‘수요일 파업’으로 전환하면서 밝힌, ‘힘이 있을 때 비축해 두어야 한다’는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노동자들의 성숙한 단면을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10년 전의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7분 만의 새벽 날치기와 네 번이나 그만 하자던 기자회견을 빼면 정부·여당의 대처 방식 또한 예전과 다른 측면이 있다. 예전 같으면 파업도 하기 전에 ‘불법 파업 엄단’이니 ‘체제 전복 세력’이니 하면서 몰아붙였을 정부가 사상 유례 없는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단매에 요정을 내지 않고 막판까지 대화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국민·노동자·정부 모두 승리하는 길 가자

날치기 이후에도 연두 기자회견에서 ‘영수 회담 불필요’와 ‘노동법 재개정 불가’를 되뇌인 김영삼 대통령이 갑자기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데 이어 종교계 지도자들과 연쇄 회동을 갖고 영수 회담을 전격 수용한 것도 김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는 전례 없는 변화이다. 이것이 작전상 후퇴인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인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일단 대화의 물꼬를 텄다는 점에서 길조(吉兆)이다.

이제 남은 길은 두 가지이다. 우선 3월로 예정된 개정 노동법 시행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노동법 개정 논의를 ‘노개위’에서 다시 출발하거나, 국회에서 야당과 함께 재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건 종국에는 국정의 파트너인 야당과 부담을 나누는 것이다. 몰매를 맞아온 정부·여당으로서는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다. ‘악법 철폐’를 고수해온 민주노총은 이미 개정 노동법 시행을 유보하는 것은 사실상 철회나 마찬가지라는 유연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날치기가 대화와 타협을 통한 해결 쪽으로 반전된 것은 본격적인 시대극의 클라이맥스가 이제부터임을 예고해 준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은 항복이 아니라 용기이다. 용기 있는 자만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은 힘을 함부로 쓰지 않은 정부와 힘을 아낀 노동자 그리고 대화 쪽으로 힘을 몰아 준 국민 모두의 승리로 기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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