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무 정지된 대통령’ 그 이후
  • 이왕주 (부산대 교수·철학) ()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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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구적 무한 경쟁 시대에 당장은 나라가 혼란스럽겠지만 장구한 시선으로 볼 때 이번 탄핵 사태는 섭리가 우리에게 베푼 축복일 수 있다. 우선 정직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총선에서 대거 당선되어, 그 신선한 물
내가 뉴욕 주립대학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 있던 1998∼1999년 텔레비전을 켰다 하면 떠오르는 헤드라인 뉴스는 르윈스키 스캔들에 휘말린 대통령 탄핵 사태였다. 국회의원·특별검사·당사자·증인·변호사 들이 갑론을박하는 논쟁이 거의 1년 넘게 이어졌다. 어렵게 의회에 상정된 탄핵안이 표결 결과 부결되자, 그 싸움은 소득 없는 이전투구로 비치기도 했다.

정말 헛된 싸움이었던가. 하지만 이 사태는 지울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미국인과, 의회정치사에 남겼으니, 지도자의 도덕적 의무, 책임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권한, 사명 등 이전에 관습의 흐릿한 안개 속에 내팽개쳐졌던 것들이 명확한 윤곽 안에 드러나게 되었다.

우리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은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통과되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나는 갑자기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된 ‘이상한 나라의 길 잃은 시민’이 되어 있었다. 국회의원은 그런 자격을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런 자격을 가질 수 있었던가. 텔레비전에서 국회의원들이 뒤엉켜 몸싸움을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한 의사당 안의 광경이야 신물 나게 보아온 낯익은 장면이다. 하지만 그 현장에서 나온 결과는 30년 넘게 유권자로 살아온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왜 탄핵의 현실이 그토록 낯설었던가. 단지 1백80명만 모이면 4천만의 대통령을 파직할 수도 있는 국회의원들의 힘에 대한 새삼스러운 놀라움 때문에? 아니면 형해화한 문구로 알았던 것이 하루아침에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충격 때문에?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멀쩡한 대통령을 두고 권한대행이 나서야 하는 상황, 여기에는 뭔가 더 심오하고 신비한 어떤 차원이 있는 것 같다.

헤겔은 <역사 철학>에서 ‘역사란 세계 정신(Weltgeist)의 노동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세계 정신’은 우리 식으로 쉽게 이해하자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섭리’에 가까운 것이다. 요컨대 역사는 섭리가 실현되어 우리 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건일 뿐이다. 이렇게 섭리가 사건으로 나타나는 ‘세계 정신의 노동’은 두 가지 숙명적인 조건 안에서 일어난다. 첫째는 섭리가 ‘세계사적 개인’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실현 과정이 끝없는 반대에 부딪히며 성숙해 가다가 마침내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변증법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헤겔의 주장을 우리의 탄핵 정국에도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국사에 개입하는 섭리는 먼저 노무현을 세계사적 개인으로 선택했다고 보아야 한다. 민권 변호사였던 그는 청문회 스타가 되고, 3당 합당 이후 힘든 정치 역정을 걷다가, 마침내 김대중 정권에서 대권 후보로 선택된 것은 섭리가 사건으로 나타나는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적인 고비고비에서 승부수를 던지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뒤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다.

‘세계사적 개인’ 노무현에게 작용하는 섭리

섭리는 곧 뇌물과 정치자금이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배꼽 안으로 들어섰다가 마침내 탄핵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섭리는 탄핵 이후 ‘성숙한 노무현’ ‘지양된 노무현’으로 태어난다. 이제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는 뇌물과 정치자금에 관해서는 후퇴 불가능한 가이드 라인이 설정된다. ‘탄핵된 노무현’은 한국의 민주 정치를 레벨업시킨 영원한 메타포로 남게 된다. 헤겔 식으로 보자면 이것이 변증법적 전개 끝에 한국 현대사에 실현된 섭리, 즉 ‘노무현의 진리’다.

전지구적 무한 경쟁 시대에 당장은 나라가 혼란스럽겠지만 장구한 시선으로 볼 때 이 사태는 섭리가 우리에게 베푼 축복일 수 있다. ‘탄핵된 대통령’ 이후 한국 의정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회의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도덕 구속복(Moral Strait Jacket)을 입게 될 것이고, 10년 20년 뒤에나 기대했던 정직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이 이번 총선에서 대거 당선될 것이며, 정치판에 흘러드는 이 신선한 물이 오래 고여 썩은 물을 내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인들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텔레비전에 어른거릴 것이다.

이런 꿈이 실현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이라면 우리는 이 비극을 온몸으로 맞딱뜨리고 부대끼고 살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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