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과 ‘묵인’이라는 범죄
  • 유승삼 (언론인, KAIST 초빙 교수) ()
  • 승인 2004.05.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제 와서 세계 여론이 미국·영국군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지만, 미국의 월권과 불법에 침묵해온 세계 각국 국민도 넓은 의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 국민처럼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공범자라고 해도 할말이
‘도대체 베토벤·칸트·괴테를 낳은 나라에서 어떻게 히틀러 같은 자가 집권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유태인 집단 학살과 같은 반 인륜적 범죄마저 어떻게 가능했단 말인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학계는 이런 의문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 해답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이겠지만 지금까지가장 유력한 견해는 그 한 가지 원인이 ‘방관’이며,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이 미워하는 자라고 해서 그들이 받는 불법적인 고통을 ‘묵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그 자체가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사담 후세인이 사악하고 탐욕스런 독재자였다는 점은 대다수 이라크 국민도 인정하고 있지만 그것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후세인의 독재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라크 국민이 해결해야 할 국내 문제이다. 누구도 어느 법도 미국에 남의 나라 내정을 무력으로 간섭할 권리를 준 바 없다.

제1차 이라크 전쟁과 달리 이번에는 후세인이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엔의 동의도 얻지 못한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구차스런 이유를 침공의 이유로 내세웠지만 대량살상무기는 그림자도 찾지 못했다.

이런 전쟁인데도 미국의 위세에 눌려 많은 나라가 방관하고 심지어는 군대를 파견해 미국을 도우기까지 했다(그런 전쟁에 파병하겠다는 우리는 또 얼마나 부끄러운지!). 또 2002년 1월 미국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알 카에다와 탈레반 포로들에 관해 ‘테러 혐의자들은 제네바 협정을 적용 받지 않는다’고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선언했을 때도 세계는 그저 하나같이 침묵했다. 그 결과 미국 심문관들은 미국 국방부 최고위층의 허가까지 받아 가며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되어 있는 알 카에다와 탈레반 재소자들을 이라크 포로 이상으로 가혹하게 학대해 왔음이 요즘에야 드러나고 있다.

이제 와서 세계 여론이 미국·영국군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지만 미국의 월권과 불법을 ‘방관’하고 ‘묵인’해온 세계 각국 국민도 넓은 의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의 독일 국민처럼 이라크 포로를 학대한 공범자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댈 수 있으며 어떤 진술도 법정에서 당신에게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다.’ 미국 영화를 보면 경찰관은 범죄 용의자를 체포하자마자 입버릇처럼 흔히 미란다 준칙으로 불리는 이런 고지 사항을 외워댄다. 1966년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모든 형사 피의자의 신문에 앞서 이런 권리를 의무적으로 고지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판결을 나오게 한 형사 피의자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양심범이거나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양심적 내부 고발자와 언론이 있었다

미란다 사건뿐 아니라 강제 자백을 엄격히 금지한 로친 사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확립한 에스코베도 사건 등등 미국 인권사에 이정표가 된 명판결들은 거의 대부분 유괴·강간·살인·마약 밀매 등등 반 사회적인 흉악 범죄 피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낭만적인 법 해석이며 범죄자에 대한 지나친 온정이고 감상주의일까. 아닐 것이다. 미국 연방 대법원 판사들은 바로 그렇게 범죄자의 인권마저 철저히 지켜갈 때 선량한 사람들의 인권은 더욱 더 철저히 보장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인권 보장의 역사도 부시를 비롯한 네오콘 권력의 폭주를 막지는 못했다. 9·11 테러로 미국의 이성은 눈이 멀었다. 인간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환경에 쉽게 좌우되는가를 실감한다. 학대 행위를 한 개인도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궁극적인 책임은 그런 조건과 분위기를 마련한 미국 권력 체제에 있다.

미국의 위신은 이번 사건으로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미국을 부러워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런 치부를 과감히 세상에 알린 양심적인 내부 고발자들이 있었고, 그를 세계에 알린 언론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많은 관련자가 있고 오랜 세월이 흘러 여건이 달라졌는데도 5·18의 전모가 아직도 오리무중 아닌가. 실은 우리가 더 부끄럽고 부끄럽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