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검증’에 대한 몇가지 착각
  • 진중권 (문화 평론가) ()
  • 승인 1998.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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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독일처럼 헌법수호청을 만듭시다. 정신 나간 ‘국가주의자’들의 구역질 나는 ‘애국’질,주제 넘는 ‘우국’질, 시도 때도 없는 ‘호국’질,이 주책없는 딸꾹질, 언제까지 참을 겁니까?”
‘랄랄라. 프랑스의 애국자 르 팽이 앞으로 1년 동안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대요. 글쎄 작년 선거 유세 도중 사회당 여성 정치가에게 손찌검을 했대요.’

한마디로 코미디다. 이런 것이 내가 유럽에서 극성스런 우익의 소식을 접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여기에서 극우파가 미디어에서 발휘하는 역할은 한마디로 서커스단의 피에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피에로들을 진지하게 대접해 주는 모양이다.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 웃으세요.

얼마 전 <조선일보>에는 베를린 자유대학 박성조 교수의 글이 실렸다. 여기서 그는 독일에서는 사상 검증이 ‘더 가혹하다’며, 그 증거로 독일의 헌법수호청을 들먹였다. 웃기는 얘기다. 헌법수호청의 임무는 할 일 없이 남의 논문에 시비 거는 것이 아니라, 좌우익 헌정 파괴자들, 특히 극성스런 우익 단체 및 정당들을 감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박교수는 헌법수호청을 들어, 거꾸로 ‘사상의 다원성’을 부정하는 <조선일보>의 위헌적 언동을 옹호했다. 성격도 참 이상하다. 왜 그러고 싶을까?

독일 나치 신문 뺨치는 보수 언론 논조

<슈피겔>과 헌법수호청이 행하는 ‘사상 검증’이란 어떤 것인가. 사회에 용케 뿌리를 내린 우익 파시스트 범죄자들의 전력을 캐내, 이들이 출세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조선일보>처럼 학술 논문을 갖고 ‘빨갱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몰상식한 짓을 했다가는 도리어 <슈피겔>한테 신나게 두들겨 맞고, 헌법수호청은 즉각 실력 행사에 들어간다.

<조선일보>는 자기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정도 된다고 야무지게 착각한다. 사실 <월간 조선> 논조는 독일 상황에서 보면 네오 나치 신문 <융에 프라이하이트>에나 해당한다. 서구 민주주의에 맞서 반기를 들었다고 이승만을 찬양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진짜 주체 사상’이 ‘박정희의 노선과 일치’한다고 감탄하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헌정 파괴범을 두둔하는 것. 이것은 민주주의 헌정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발 행위다. 네오 나치들도 ‘자유 민주주의’를 이렇게 까놓고 공격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이런 몰상식한 농담들이 몇백만 부씩 버젓이 복제되어 가정으로 배달될 수 있을까? 괴이한 일이다. 그래서 이 참에 나는 제안하는 바다. 우리도 독일처럼 헌법수호청을 만듭시다. 그래서 민주주의 헌정을 부정하는 언동을 하는 자들, 집어넣읍시다. 이승만 밑에서 ‘반공’을 팔아 출세한 친일파들, 좌익 전력자 주제에 툭하면 색깔 시비 거는 위선자들, 전두환 파쇼 정권에 협력했던 자들, 철저하게 전력을 캐서 국민에게 공개하고 공직에서 쫓아냅시다.

‘더 가혹’한 ‘사상 검증’을 한다는 독일에는 지금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운동권이 만든 녹색당은 지금 여당이다. 반면 공화당·독일민족연합 같은 극성스런 우익 정당은 의석을 다 합쳐야 3%로, 의사당에 발도 제대로 들여놓지 못한다. 숨어서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몰라도 적어도 공개 석상에서는 헌법수호청 눈치 보느라 조신하다. 한국에서처럼 주제 넘게 총리 후보의 사상을 검증한다고 설쳤다가는 국민에게 몰매를 맞는다. 독일에서 극성스런 우익 단체들은 감시 주체가 아니다. 감시 대상이다.

독일이 헌법수호청을 만든 것은 과거 민주주의에 허점이 있어 파쇼 독재를 허용했던 뼈아픈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자유 민주주의에는 자기 모순이 있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다 보니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파쇼들에게까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널럴하게’ 그렇게 했다가 독일은 결국 히틀러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었다. 이 때문에 헌법수호청이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를 보자. 민주화가 되니까 언론 자유를 빙자해 일개 신문사가 주제 넘게 ‘밤의 대통령’이 되어 행패를 부려도 변변히 제재할 수단이 없지 않은가.

40년 독재를 경험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널럴하게 하면 안된다. 밤의 대통령? 헌법을 파괴하는 것도 고도의 도덕성 표출일 수 있다? 헌법을 능멸하는 이 따위 고약한 농담을 더 이상 참으면 안된다. 여러분, 어렵게 되찾은 민주주의, 널럴하게 하면 안됩니다. ‘명예 훼손’ 정도로 안돼요. 우리도 이 참에 헌법수호청 만듭시다. 독일처럼 화끈하게 합시다. 정신 나간 ‘국가주의자’들의 이 구역질 나는 ‘애국’질, 주제 넘는 ‘우국’질, 시도 때도 없는 ‘호국’질, 이 주책없는 딸꾹질, 언제까지 참을 겁니까? 애국, 딸국, 우국, 딸국, 호국, 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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