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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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1.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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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허진호

주연/유지태·이영애

제작사/사이더스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젊은 시절 상처한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겨울 그는 지방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은수와 그는 녹음 여행을 떠난다. 자연스레 가까워진 두 사람은 어느 날 은수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고, 그후 상우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겨울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는 봄을 지나 여름에 접어들면서 삐걱거린다. 상우가 청혼하자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부담스러운 표정을 내비친다. 그리고 점차 상우를 멀리한다. 더 이상 전화도 오지 않고 찾아가도 볼 수 없게 되자 상우는 힘들어 한다.


어렵게 찾아가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상우에게 은수는 그저 "헤어져"라고 말한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랑이 변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한다.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미련과 집착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과 강릉을 오간다. 그럴수록 더 멀어지는 은수. 사랑을 잊지 못해 발버둥치던 상우는 비로소 식구들이 각자 지니고 살아온 삶의 상처를 돌아보게 되고, 할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계기로 다가온다.(9월28일 개봉)


김영진이 본〈봄날은 간다〉★ 5개 중 4개

허진호식 멜로 봄날이 왔다




허진호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는 너무 농밀하게 등장 인물의 마음을 담아내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밀도 있는 감정, 사랑하고 헤어지고 떠나 보내는 감정의 흐름이 유연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화면 호흡이 은은하면서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정확하게 베는 나머지 영화가 끝나면 마음이 아파 온다.


소리를 채집하는 녹음 엔지니어 상우와 지방 방송국 PD이자 아나운서인 은수의 만남을 담으며 시작하는 〈봄날은 간다〉는 주로 상우의 처지에서 경험하는 연애의 떨림과 환희, 그리고 헤어짐의 아픔을 담는다. 이 영화는 거의 강박적일 만큼 조금씩 비어 있는 공간 구도에 몰두하면서 그 빈 공간의 환유적 의미를 통해 삶의 덧없는 느낌, 모든 것이 늘 채워져 있지 않고 채워져 있던 것은 사라지고 비워지며 다른 것으로 메워질 때까지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라는 느낌으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이상하게도 영화의 활동사진적 본질은 사라져간 것에 대한 상실감을 더 강렬하게 환기한다. 사진이 세계의 어떤 순간의 고정된 이미지를 안온하게 제시한다면 〈봄날은 간다〉는 실제 세계처럼 스크린 위의 화면도 여전히 우리 삶과 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덧없는 유동성의 감각을 부추기는 것이다.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는 사라져 가는 소리를 채집하고, 라디오 PD이자 아나운서인 은수는 그 소리를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방영한다. 시간과 공간을 방부 처리해 보존하는 사진처럼 그들의 직업은 현실의 어떤 순간에 흘러가 사라진 소리를 녹음해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충일감을 느끼게 했던 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잊지 못하는 상우의 할머니는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틈만 나면 역에 나가 죽은 남편을 기다리는 할머니는 본질적으로 상우의 직업이 갖고 있는 속성, 시간의 흐름에 거역하려는 욕망을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은수에게 상우는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원과 찰나의 대비 속에서 〈봄날은 간다〉는 지속적으로 흘러가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감각을 환기한다. 한번 지나간 것은 되돌릴 수 없고 남은 것은 기억하는 일뿐이다. 첫 번째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허진호는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을 카메라의 압침으로 고정해 놓으려 한다. 채워짐과 비워짐의 공간 역학이 주는 정서를 환기해, 지나간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표나지 않게, 그러나 깊은 슬픔으로 끌어올린다.


유지태와 이영애 두 배우도 눈짓과 손짓과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몸짓만으로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을 화면에 새긴다. 풍경과 주변 일상에서 등장 인물의 마음을 담는 〈봄날은 간다〉는 올해 한국 영화 중 군계일학이다.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심영섭이 본〈봄날은 간다〉★ 5개 중 4개

멀리 있는 사람 멀어져 가는 사랑




어떤 사랑은 너무 늦게 찾아온다. 한적한 소도시의 버스 정류장. 처음 만나는 여자는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 채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고,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만남의 증표로 악수를 청한다. 그러자 "너무 늦게 오신 것 같네요"라며 자리를 뜨는 여자. 그 순간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버스 정류장은 사랑도 추억도 아스라이 다가갔다가 멀어지는 삶의 정거장이 된다.


어쩌면 소리를 채집하는 남자와 소리를 흘려버리는 여자는 애초에 각기 다른 궤도에서 돌다가 살짝 스치는 별의 운명 외에는, 허락된 사랑이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숲에서 두 사람이 처음 사랑을 키워 가는 장면에서 딱 한번 여리게 진동했던 카메라는 이후 오버하는 법이 없다. 정선의 개울물 소리도 산사의 풍경 소리도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법. 정중동의 한순간에만 잡히는 적막의 내공으로 허진호는 여전히 감정과 움직임 모두를 자제하고 상우와 은수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마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술에 취해 한 달음에 달려가고, 그 사랑이 떠나가자 그 사람이 날 보고 싶어할 것 같아 깨어 있는 마음의 자리를. 그 자리는 안에서 밖을 보는 자리, 올 것 같아서 기다려지는 자리, 내가 떠나서 남겨지는 삶의 무게가 조금은 많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자리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 허진호 감독은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와 기다림의 몸짓을 잇닿아 놓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안타까워하며 방황하는 상우에게, 할머니는 오히려 사랑하는 이와의 불운했던 기억을 비워냄으로써 기다림과 그리움에 몸을 의탁할 방법을 가르쳐 준다. 라면과 화분이라는, 인스턴트화하고 뿌리 내리지 못하는 은수의 사랑에 대비되는, 아주 오래 묵혀 미움조차도 삭혀낸 할머니의 사랑에서는 박하사탕 향내가 난다.


〈봄날은 간다〉는 이렇게 사랑보다는 사랑의 자세에 관한 영화였다. 공간으로 만남을 이야기하고 시간의 공기로 빈 자리를 채우며, 계절로 인생을 비유하는 허진호의 내공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시대의 오즈 야스히로를 느낀다. 상실의 바다에서도 묵묵히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는 따뜻한 말줄임표 같은 영화.


차마 쳐다볼 수 없을 것 같은 밀봉된 사랑의 기억에도 환한 봄의 햇살은 노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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