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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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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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게임 권투에서 은메달을 따 경사로 특채된 강철중(설경구). 남들이 두 계급 진급할 동안 그는 강경장·강순경으로 두 계급 강등된다. 지명수배자 풀어주고 돈 받기, 마약 훔치기…. 그의 비행 일지에는 끝이 없다. 무단 이탈에 무교육·무계획. 가진 것은 단단한 주먹밖에 없는 막무가내.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안다. ‘조규환, 그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한다.’


독일계 금융회사 펀드매니저인 조규환(이성재). 그는 혼자 힘으로 공부했고 스스로 노력해서 이사로 승진했다. 자신의 이력에 오점을 남기거나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그는 아주 똑똑한 살인범이다. 명석한 두뇌와 특유의 깔끔함으로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곧 그는 큰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생각 없이 덤비는 막무가내 형사 강철중을 따돌려야 하는 것이다.


강형사가 조이사를 쫓는 이유는 그가 부모 살해범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가 없다. 강형사는 심증만 가지고 조이사를 무리하게 취조하고 구타한다. 조이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돈과 권력을 이용해 그는 강형사를 보직 해임시킨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둘의 싸움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 펼쳐지는데….(1월25일 개봉)



진화한 <투 캅스>



공의 적>은 <투 캅스>로 형사 코미디 영화의 장을 연 흥행 감독이 제 발로 새로운 장르로 걸어 들어간 진화의 발자취다. 이 영화는 <투 캅스>의 뼈대를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인정 사정 볼 것 없는 형사와 희대의 살인마의 대결 구도에서 한국 사회의 왜곡된 윤리 의식에 풍자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공공의 적>의 주인공 강철중은 인간 ‘말종’이며 하는 짓이 깡패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악질 형사다. 매사에 심드렁한 그는 세상을 포기한 듯한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악질인 살인범을 만났을 때 그는 비로소 우리 시대의 윤리적 잣대를 희롱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정체를 드러낸다.


강철중은 희대의 살인마를 잡는 게임을 놓고 자신과 내기를 건다. 몽롱한 어조로 중얼거리듯이 비논리적인 동어반복을 횡설수설하며 패륜의 부도덕함을 후배 형사에게 설교하는 그의 모습은, 한 번도 자신의 머리로 논리화하지 않았던 윤리 감각을 스스로 주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조규환이 살인마라는 확신이 들자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간다. 그리고는 무작정 이실직고하라고 을러댄다. 그것이 그를 반영웅으로 보이게 만드는 이유다. 악인인 그는 자신보다 더한 악인의 범죄에 분노한다. 세상에는 선인과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인간과 덜 나쁜 인간이 있는 것이다.


강철중과 살인마 조규환은 본질적으로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인 조규환은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동원하는 간단한 해결책을 알고 있다. 폭력으로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사 강철중의 행동 양식과 똑같다.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조규환은 광기의 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아다 취조하는 강철중에게 그는 속삭인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치자. 사람을 죽이는 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냐?”



강철중은 그의 말을 논리적으로 접수할 수가 없다. 이 영화는 비이성적인 행위의 연속으로 풍자적 웃음을 끌어낸다. 강철중은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자기와 동류인 인간이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갖고 더 큰 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한다. 그 점이 기가 막히게 이 사회를 관통하는 블랙 코미디의 정수를 뿜어낸다.



거기까지다. <공공의 적>은 비슷한 인간끼리의 대결 드라마로 풀기에는 밀도가 모자란다. 그러나 형사 강철중의 캐릭터만큼이나 좌충우돌하는 재미와 풍자가 들어 있다. 설경구가 연기한 형사 강철중은 오랫동안 한국 영화의 잊히지 않는 캐릭터로 남을 것이다. 김영진




‘조폭의 웃음’ 가고
‘경찰의 폭소’ 오다






구끼리 미안한 것 없다’며 대한민국 남성 관객들의 숨겨진 영웅주의를 아무리 부추겨도 암흑가의 반영웅 출신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조폭들은 결국 칼받이 신세일 수밖에 없다.


반면 형사들은 적당한 액션과 웃음과 사회 풍자를 선사하면서도 상업적으로 안전한 장르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최근 우리 극장가의 형사물 범람은 장르의 신선미를 소진해 버린 조폭 영화에 싫증을 느끼는 관객들이 또 다른 변형된 폭력과 일탈의 욕망을 찾아 떠나는 작은 엑소더스일 것이다.



이를 흥행의 귀재 강우석 감독이 놓칠 리가 있나. 강우석 감독의 신작 <공공의 적>의 압권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설경구의 연기에 있을 것이다. <공공의 적> 주인공 강철중은 형사 신분이면서 마약을 팔려 하는가 하면, 엉뚱한 사람을 빈집털이범으로 몰아 ‘껀수’를 올린다. 서랍을 여니 달랑 볼펜 한 자루밖에 나오지 않는 장면이 보여주듯 강철중은 기존 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인물이다.


설경구는 노회한 경찰의 볼썽사나운 느물느물한 겉면과 결기 어린, 그러면서도 적당히 인간적인 내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호연은 한국 영화계의 어릿광대이면서도 사나운 짐승, 즉 또 하나의 미워할 수 없는 악질 경찰의 전형을 탄생시켰다.



강우석 감독이 세상을 보는 눈은 여전히 허허실실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적당히 부패하고, 그러면서도 미워하기에는 적당히 살이 붙은 인간과 제도들. 강철중은 이 사회의 주변부에 포진한 숱한 대한민국 국민 중 하나라는 점에서 김감독이 만든 전작의 주인공들과 궤를 같이하는 인물이다.



이성재가 분한 살인마 조규환은 <아메리칸 사이코>에 등장하는 상류 사회 살인마와 같은 차가운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가 강철중과 대비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와 매우 동질적이라는 점은 <공공의 적>에 살얼음 낀 긴장감을 더해준다.


단지 권력과 폭력으로만 상대를 제압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의 서로의 거울상처럼 보일 지경이다. <공공의 적>의 클라이맥스는 강철중과 조규환의 한판 대결인데, 이들이 치고받는 마지막은 토종판 개싸움이다.



강우석 감독의 전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는 듯 보인다. 스토리의 눈높이는 딱 중학생 수준으로, 여기에 폭력과 웃음을 반반씩 칵테일해 폭력의 체감지수를 희석해라. <투 캅스> 이래 쌓은 형사물에 대한 득의 만만한 자신감과, 가끔은 오버하는 구식 연출을 그대로 노출한 <공공의 적>은 강우석 감독의 세계관과 흥행관을 집약한 작품이다. 바로 이 지점이 연출가 강우석이 아니라, 적절한 재미와 흥행이 보장되는 시나리오를 거머쥐고 역시 흥행이 보장되는 스타 설경구와 이성재를 캐스팅할 수 있는 제작자 강우석의 능력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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