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천릿길
  • 안병찬 (<시사저널>편집고문·경원대 신방과 교수) (abc@sisapress.com)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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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길을 걸어간다. 길을 가는 법은 여러 가지이다. 권력자들은 몇 억원이나 몇 십억원을 꿀떡 삼키고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구름도 없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들이 우러러본 하늘에는 검은 먹구름이 가득 차 있다. 보통 사람들 사이에도 과정을 생략한 채 길을 걷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그래서 복권·마권 한장에 횡재수를 걸고 산다. 그런 가운데 간혹 먼길을 걷는 사람도 있다.






먹구름이 내려앉고 봄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아침이다. 순례할 사람들은 혹은 도보로 혹은 택시로 인적 없는 남산공원 길을 속속 올라온다. 그들이 아침 10시에 모인 장소는 남산공원 꼭대기 팔각정 앞이다.



그들은 천릿길을 갈 ‘녹색 순례자’들이다. 집결한 뒤 그들은 자기들한테 꼭 어울리는 노래로 김민기씨가 작사·작곡한 〈천릿길〉을 불렀다. 본래 순례란 본산의 소재지를 방문하여 참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녹색 순례자들은 미군에게 빼앗긴 땅을 찾아가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들이 선택한 순례의 길은 결코 안이하지 않다. 순례지를 찾아서 대열을 지어 먼길을 이동하는 작전 행동이다. 배낭을 메고 온몸을 자연에 의지한 채 5월7일부터 14일까지 9일 동안 행군하는 극기 여행이다. 순례를 통해 행동가들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자연과 온몸으로 소통한다. 그들은 미군이 파괴한 우리 농토와 땅을 직접 보고 느낀다.



녹색 순례단 행군의 세 가지 원칙



녹색순례단원은 오합지중이 아니다. 그들이 철두철미한 행군 문화를 확립했음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이 잘 보여준다. 첫째, 하루 8시간 이상 걷는다는 원칙이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을 두 다리로 걸어서 자연의 경이와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있는 환경운동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둘째, 녹색 순례는 순례라는 원칙이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먹고 자고 씻는 생활에서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도록 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기 위함이다. 셋째는, 함께 걷는다는 원칙이다.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낙오한다면 순례는 중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열린 마음으로 동지들과 함께 걸으며 교감할 자세를 갖기 위함이다.



녹색순례단은 〈천릿길〉 노랫말처럼 ‘졸지 말고 쉬지 말고’ 행군을 계속한다. 그들은〈천릿길〉의 후렴구처럼 걸어간다. ‘가자 천릿길 굽이 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가자 천릿길 굽이 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군산→매향리→용산으로 주권 지키기 대장정



이렇게 확신에 찬 사람들의 의지가 없다면 친미숭미(親美崇美)주의자가 판을 치는 이 땅에서 우리 권리와 주권을 제대로 말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마을과 채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지는 군산의 미군 공군기지 탄약고. 얼마나 많은 폭탄들이, 그리고 어떤 종류의 폭탄들이 있는지 모르는 채 살아가야 하는 군산 시민들. 미군들이 한국에 첫발을 내딛는 오산 미군 공군기지. 그 기지에 누가 들어오고 누가 나가는지, 어떤 물건과 무기가 들고나는지, 미군이 말해주기 전에 우리 행정 당국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미군으로 인해 일어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폐해를 녹색순례단은 파헤친다. 그리하여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서 억눌리고 권익을 침해받는 미군기지 주변 주민과 그 환경에 희망과 생명의 씨앗을 심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군산·매향리·평택·파주·동두천·의정부·용산의 천릿길을 행군했다.



언젠가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서 열린 철인 3종 경기 참가자들의 기이한 행동을 전해들은 일이 있다. 선수들은 살인적인 삼복 더위 속에 수영·사이클·마라톤 경기를 마친 밤에도 지쳐 쓰러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모닥불을 에워싸고 원기 백배하여 밤새도록 떠들고 노래하더라는 것이다. 녹색순례단원들이 하루 8시간 이상씩 걸으면서도 저녁마다 주민간담회를 열고 평가하고 점검하며 의기가 충천한 것은 그들이 철인 선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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