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
  • 고종석 (소설가) ()
  • 승인 2002.05.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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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에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지금 나는 꼭 그 갑절의 나이가 되었다. 그 해 5월에 대학 졸업반이었던 나는 지금 한 인쇄업체의 계약직 사원이다. 그 5월의 기억들이 또렷하지는 않다. 5월1일에 교정에서 계엄령 철폐를 촉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한두 차례 학교에서 밤을 새운 기억이 아렴풋이 떠오른다. 13일부터인가 사흘간 서울 시내를 누빈 학생 시위대에 나도 뇌동자로 끼어 있었던 듯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서울역-남대문 일대를 구호와 노래 속에서 걷는 것은 불안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이었다. 그 날이 아마 15일이었을 것이다.



계엄령이 제주도에까지 확산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진 17일이 일요일이었다는 기억은 엉클어진 회상 속에서도 비교적 또렷하다. 그 날 조간 신문을 읽으며 불편한 예감으로 ‘피의 일요일’이라는 말을 떠올렸으니까. 그리고는 곧 광주와 관련된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고, 이내 그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1979년 10월26일 저녁 서울 궁정동에서 시작된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27일 새벽 광주 금남로의 전남도청에서 끝났다. 어쩌면 그 봄은 1979년 12월12일 저녁 서울 한남동에서 이미 바스러져버렸는지도 몰랐다. 사실 그 해 봄은 매순간 바스러질 것 같았던 위태위태한 봄이었다. 이어진 여름은 길고 추웠다.



지난 22년을 나는 소박한 하층 프티브루주아로 살았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고, 단속적으로 직장 생활을 했다. 서울이 지겨워져 외국을 떠돌기도 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내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내년이면 큰아이가 스물두 살이 된다. 지난 22년동안 내가 몇 차례나 그 해 5월의 광주를 정녕 아프게 되돌아보았을까를 생각하면, 내 몸에 들러붙은 이기주의에 구역질이 난다. 내가 내 큰아이의 나이였을 때, 4·19는 이미 내게 까마득히 먼 역사였다.


그것이 내가 태어난 뒤의 역사인데도 그랬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광주의 5월은 내 큰아이에게 훨씬 더 까마득하게, 그래서 저와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일은 이미 지난 세기의 역사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5월 광주는 대학 교정이나 자취방 안에서만 전수되는 외경(外經)이었다. 제6공화국이 들어선 뒤 그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밋밋한 이름으로 ‘오피셜 스토리’에 편입됐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 복권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을 오로지 ‘지역’이라는 코드 안에 가두려는 집요한 노력은 꽤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망각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타인의 불행을, 또는 앞선 세대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상상력도 인간에게는 턱없이 부족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참을 생각하며 잠을 설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갑오년 농민군의 좌절을 생각하며 식욕을 잃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아니, 더 가까이는 권인숙의 모멸감이나 박종철의 공포를 상상하며 치를 떨 수 있는 감수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그들을 일상의 의식 바깥으로 밀어내는 내 건망증과 불감증 앞에서 나는 절망한다.



5월 광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면



때로, 역사는 탐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의사(擬似) 허무주의의 유혹을 받는다. 모든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역사라는 생각, 또는 적어도 주류의 역사라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누구도 어떤 당파성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차라리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5월 광주에 아직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면, 그것은 5월 광주가 아직 충분히 많은 벗들을 못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벗들을 늘리기 위해서는 망각과 싸워야 하고 무심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역사 일반에 적용되는 말이다. 비판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교수대로 보낸 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릴 때, 전두환의 삼청교육대에서 짐승처럼 학대받았던 사람들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망각과 무심의 각질 속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협력자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낼 때, 역사는 또 다른 도살자의 손을 통해 반드시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이것은 다른 누구에게 앞서 나 자신에게 건네는 자경(自警)의 말이다. 겁 많아 살아 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삼가 5월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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