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서 역사 캤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4.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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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책이 될까 싶었는데, 막상 인쇄된 책을 보니 징그러워 집어들 수조차 없었다.” 번역가이자 출판평론가인 표정훈씨(35·사진)는 최근 자기 집안 역사를 소재로 <나의 천년>(푸른역사)이라는 책을 썼다.

남이 쓴 책을 독해하는 것이 표씨의 업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족보를 독해 대상으로 삼았다. 천년 전 중국에서 건너온 표대박, 조선 초 김종직의 문하로 이조참판을 지냈던 표연말, 임진왜란 때의 역관 표 헌 등 신창 표씨 조상들부터 사회주의자였던 할아버지 표문학, 군 장성을 지낸 아버지 표명렬까지, 오늘날 그의 몸과 정신을 만든 ‘원소’들이 하나하나 호출된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객관화한 솜씨가 놀랍다. 일제 시대 인텔리 사회주의자였던 할아버지는 인촌 김성수의 친일 행각을 알면서도 그를 존경한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죄하면서도 참전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이율배반은 모순투성이의 우리 역사와 맞물리면서 진정성을 확보한다. 저자는 ‘표문학’과 ‘나의 할아버지’, ‘그’와 ‘내 아버지’라는 호칭을 적절히 섞어 쓰면서 가족사를 한국 근대사에 성공적으로 착근시킨다. 그의 독해가 가족사를 넘어서 ‘책이 되는 순간’이다.

자기 고백을 객관화하려는 시도가 문학과 달리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난해 나온 전인권 교수의 <남자의 탄생>에 이어 귀한 성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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