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가볼 만한 두메 마을 7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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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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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고향집 운치 찾아 단풍 진 옛길 뚜벅뚜벅
길은 강원도의 마음처럼 구불구불 휘어지고 에돌아 친친 지친 마음을 똬리 튼다. 단풍 구경이 다 끝나 외로운 산중.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듯 추적추적 빗방울을 뿌린다. 미시령에서 길을 잡아 마장터로 가는 길. 산사람들은 이 길을 샛령길이라 부른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은 드물어서 한동네 용대리 사람을 붙잡고 물어봐도 절반 이상은 고개를 젓는다.

옛날 고성이나 속초의 마부들은 소금을 싣고 이 샛령길을 넘었고, 인제나 원통의 지게꾼들은 감자나 잡곡을 지고 이 길을 넘어 마장터에 이르렀다. 마장터는 일종의 난전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산중 장터였던 셈이다. 마장터라는 이름은 바로 이 곳에 말이 쉬어가는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길은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이내 울창한 숲으로 꼬리를 감춘다. 숲은 원시림처럼 울창했고, 희부연 안개가 끼어 모든 것이 흐릿하다. 곰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무섭도록 적막한 숲길. 땅의 영혼, 나무의 정령들에게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인다.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다행히 숲의 정령이 자작나무 잎들을 달랑달랑 은전처럼 흔든다. 내 옆에는 낮게 깔린 적막과 적막을 적시는 뿌연 하늘과 하늘에 잠긴 나무들, 숨찬 언덕과 평화, 숨소리뿐이다. 잎 달린 나무들마다 때늦은 단풍이 떨어져 조붓한 산길은 온통 아른사른한 낙엽길이다.

샛령길 너머 마장터에 이르자 오두막 샛집 두 채가 나그네를 반긴다. 샛집에는 백승혁씨(51)와 정준기씨(60)가 각각 살고 있다. 이렇게 비가 오건만, 백씨는 출타했고, 마장터에는 정씨만이 남아 낯선 발자국 소리에 문을 빼꼼 열고 내다본다. “아이고, 이래 비가 오는데 어째 왔소?” 정씨는 어여 들어와 젖은 몸이라도 말리라 한다. 아침에 군불을 때놓은 덕에 방바닥은 따뜻하다.

정준기씨는 약초꾼이며, 나물꾼이다. 그가 마장터에 들어온 것은 25년 전. 정씨에 따르면 20년 전까지 이 곳에 있던 집 두 채는 모두 굴피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굴피 채피가 어려워지면서 억새를 베어다 지붕을 덮었다. 워낙 깊은 산중에 집이 있다 보니, 마장터에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방에서는 아직도 등잔불을 켜고, 아궁이에서 꺼낸 불씨를 화덕에 담아, 거기에 라면을 끓이고 밥을 한다. 냉장고는 필요없다. 개울 옆 우물이 차고 시원한 냉장고여서, 김치며 반찬도 거기에 둔다.

■가는 길-44번 국도를 타고 인제와 원통을 지나 한계령과 진부령 갈림길에서 진부령 쪽 46번 국도로 길을 잡아 가다가 용대리에서 466번 지방도로인 미시령으로 우회전하여 가다 만나는 ‘창바위’에서 계곡을 따라 샛령 쪽으로 십리쯤 가면 마장터가 나온다. 잘 곳은 용대리에 많다.
막바지 가을 햇살이 차창에 잘게 부서져 내린다. 수하계곡을 따라가며 30리에 걸쳐 뻗어 있는 적막한 길. 길이 끝나는 송방마을에서 다시 2km쯤 차가 다닐 수 없는 계곡길을 따라 가 만난 오무마을. ‘오무’라는 말은 우묵하다는 뜻으로, 골이 깊고 우묵한 곳을 가리킨다. 이름처럼 오무에는 골이 깊고 냇물이 맑아 물고기가 많았다고 전해 온다.

오무에는 아직도 굴피집이 한 채 남아 있다. 물론 헛간채이기는 하지만 그 운치는 오래 전 방앗간으로 사용하던 운치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주인인 김순금씨는 이 굴피 헛간채가 시집 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굴피를 새로 얹은 지는 30년쯤 되었단다. 그 동안 돌보지 않아 여기저기 서까래가 내려앉고 벽이 주저앉은 모습이 마치 우리네 농촌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오무에는 수십 년 전만 해도 집들이 40여 호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모든 집이 굴피집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때 죄다 함석 지붕과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현재 오무에는 여덟 집이 사는데, 그 중 일곱 집이 배씨이고, 한 집만 박씨이다. 무려 3백여 년간 오무는 배씨 집성촌을 유지해 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위, 아래, 옆 집이 모두 친척이다.

유일한 외지인인 박영덕씨(66)도 사실은 외가가 이 곳에 있어 들어오게 되었단다. 마침 길에서 만난 박씨가 나를 이끌고 누님이라는 박순옥씨(67) 집으로 안내해 갔다. 박씨는 멀리서 온 손님이라며, 직접 집에 있는 디딜방아로 찧은 쌀가루로 쌀떡을 해서 내왔다. 방아로 찧어 낸 떡이라 그런지 한결 찰지고 맛이 좋다. 잠시 후 입가심으로 막걸리까지 나왔다. 이렇게 떡도 먹고 술도 먹는 차에 날은 어두워 오무에서의 하루가 가뭇없이 저물었다.

■가는 길-오무까지는 물론 버스가 운행하지 않으며, 송방까지만 하루 네 번 시내 버스가 운행한다. 승용차는 영양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상행·칠성을 지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수비에서 장수포천을 따라 올라간다. 수하리에서 신암과 송방 가는 길이 나뉘는데, 송방 쪽으로 방향을 튼다. 송방에서 오무까지는 2km가 조금 넘는다. 일반 승용차로 오무에 가려는 것은, 자동차를 계곡에 버리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숙박은 송방에 있는 민박집을 이용하거나 수비면에서 여인숙을 이용한다.
두루봉이라는 봉우리 밑에 있다고 하여 봉두고니(봉두고리)라 하였다. 박지산과 발왕산, 병두산과 두루봉 같은 고봉에 둘러싸인 봉두고니는 그야말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두메 산골이다. 봉두고니로 가자면 우선 신기리 쪽에서 박지산 모래재를 넘어야 한다. 진부에서 봉두고니까지는 40리가 족히 넘는 길.

이 마을에는 아직도 ‘투방집’이 두 채 남아 있다. 투방집이란 통나무를 어긋 쌓아 흙고물로 벽막음을 한 귀틀집인데, 천장 높이는 사람이 간신히 드나들 정도(방안에서 일어서 있지도 못할 정도)로 낮다. 보통 지붕은 짚이나 겨릅을 해 얹었으나, 지금은 짚이나 겨릅집을 찾아볼 수가 없고, 봉두고니에 남아 있는 투방집 두 채도 모두 함석을 얹었다.

투방집의 원형이 비교적 제대로 남아 있는 조석기씨(58)의 집은 한국전쟁 때 지어졌다. 원래 이 투방집도 예전에는 지붕이 ‘지푸락지’(짚)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너도나도 초가집을 걷어내는 통에 그도 함석으로 지붕을 바꾸었다고 한다.

방문은 허리를 잔뜩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조그맣고, 방안에 앉아서 손을 뻗치면 천장이 닿을 정도로 지붕이 낮다. 부엌 또한 낮은 지붕 때문에 연기가 잘 빠지지 않아 벽과 천장이 온통 새까맣게 그을려 반들반들 윤이 흐른다. 이 마을 박봉하 노인(86) 댁에는 과거 왜군에 쫓기던 의병을 도운 일화가 전해오며, <정선 아리랑>에도 의병이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던 가사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두란 봉두고니 스물네나드리 착, 건너서 신오장네 맏며느리 사람 살려라’

■가는 길-봉두고니(봉산리)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 하진부 인터체인지로 나와서 진부-정선 40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신기리 쪽으로 꺾어들어 모래재를 넘어야 한다. 진부에서 1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다. 숙박은 진부나 정선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가지가 부러질 듯 주황색 감을 늘어뜨린 감나무를 보며 돌고개에 당도했다. 그리고 나는 도착과 동시에 요란한 손님 접대를 치러야만 했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개 한 마리가 나를 보며 크엉컹컹 짖어댄 것이 이내 온 동네 개들을 깨워 산중이 떠나갈 듯한 개소리로 돌변한 것이다. 나는 갑자기 도둑이라도 된 듯 제 발이 저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밥 먹던 마을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죄 문을 열고 누가 왔나 살피더니 나를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조용하게 마을을 돌아보고 우아하게 떠나고 싶었던 계획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어떤 눈은 ‘소를 훔치러 왔나’였고, 어떤 눈은 ‘헛간에 고추를 훔치러 왔나’였다. “마을 구경 좀 왔습니다.” 다행히 도둑치고는 내가 너무 어리숙하게 생겼던지 마을 사람들은 금세 안심하는 눈치였다.

돌고개. 지도에는 석현리라고 적혀 있지만, 이 곳 사람들은 옛날부터 돌고개라 불러 왔다. 산으로 계속 뻗어올라온 길도 이 곳에서 마치 길을 잃은 듯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다만 길 끝에는 저 길을 통해 운반했을 흙과 돌로 지은 흙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옆에는 또 감나무들이 올망졸망 모여 갓난아기 주먹만한 주황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벌써 불 때는 아궁이가 그리웠다. 무작정 연기 나는 집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아침밥을 다 먹었는지 노부부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마루에 서 계시고, 할머니는 봉당에 어색하게 서서 나를 쳐다본다. “미물(메밀) 비러 갈려구유. 잘 되두 안 했어유. 아이구 저 논에두 멧돼지가 막 내리와서 움막 지놓고 두달을 망을 봤다구유. 낮에는 일하구, 저녁에 누자면서. 베를 다 씹어먹구, 깨밭두 막 둘쑤시놓구 그래. 얼마 전에 한번은 홀무 놓구 잡았었드마 누가 끌러가 뿌렀어. 다 홀낀 거를 누가 쨉어간 모냥이여.” 김길상 할아버지(80)가 마루에 서서 서울에서 온 낯선 사람에게 공연히 푸념을 늘어놓았다. 멧돼지가 벼이삭까지 씹어먹는다는 것은 여기 와서 처음 듣는 소리다.

곶감철인데도 마을에는 아직 나무에 감이 그대로다. 농사가 바빠서 손을 못대고 있다는 것이다. “서리 내리면 물러서 못 쓰는데, 원체 바쁘니까유. 여기 감은 먹감이유. 우리야 곶감 여남은 접썩 쪼맨해유. 낭기 높으니 이 나이에 올라가든 못하구 저래 있는 감두 인제 다 빠질 판이유.” 곶감도 늙어지면 하기가 힘든 일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마을에 곶감이 내걸린 집이 몇 집 없다. 젊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증거다. 겨울이 코앞인데, 이렇게 고향은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돌고개에서 내려와 십리 가웃 계곡을 타고 오르면 물한리다. 물한리에서 만난 정연기 할머니(73)는 곶감이 작년만 못하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작년에는 감타래 꽉 차게 매달았는데, 올해는 마이 비었어. 작년에 3동은 했지. 우리 감나무가 한 30그루 되는데, 올해는 아무케두 작년만 못해.” 열아홉살 때 결혼해서 이 마을에 들어온 뒤로 해마다 곶감을 깎아 매달았다는 할머니는, 이제 곶감 깎고 매달기에도 힘에 부치는 나이가 되었다.

■가는 길-상촌면 돌고개에 가려면, 경부고속도로 황간 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579번 지방도로를 따라 상촌면(임산) 소재지를 지나 물한계곡 쪽으로 가다가 물한리 들머리에서 좌회전해 올라가면 된다. 물한리에 민박집이 많아 잠잘 곳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을 앞에 바위 두 개가 뿔같이 솟아 있어 각기리. 각기에서 남서쪽으로 난 비포장 도로를 따라 십리쯤 들어가면 금수산 자락에 폭 안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온다. 예부터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이현(梨峴), 배마루라 불리는 마을이다. 30년 전만 해도 20집이 넘게 살던 곳이지만 현재 이 마을에는 단 네 집이 산다.

맨 윗집이 김두천(68)·신윤옥 (63)씨네, 그 아랫집이 전인출(68)·박금분(64)씨네, 맨 아랫집이 김순예씨(64)네 집이다. 깊은 산골은 벌써 겨울. 군불을 때는 아궁이가 그리워 전인출씨네 집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 몸이래두 녹이유.” 전씨가 처음 만난 나그네 대접을 아끼지 않는다. 박금분씨는 따뜻한 화롯불에 서리 맞은 감과 고욤까지 내놓는다. 시골 인심이란 아직 온기가 남은 화로처럼 따뜻하다.

전씨 부부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40여 년 전. 그 때만 해도 마을에는 스물다섯 집 정도가 살았으나, 화전 정리를 하면서 대부분 소개되어 떠났다. “그 땐 소낭구 속껍데길 이래 벳겨 그 시뻘건 걸 먹으면 뒤가 멕혀서, 말해 봤자지 뭐. 칡뿌린 그래두 억시긴 해두 괜찮은 거유. 나물을 캐다 보리를 넣어 죽 낄이 먹구. 보릿고개 때는 거 시퍼런 보리 이삭을 가지구 발방아에 찌니, 껍질이 잘 안 벳겨져서 밥을 해 노면 목구녕이 때끔거리구. 아측에 나물무데기 먹구 장에를 가며는 증심 한 끼두 못먹구 되루 짐을 짊어지구 와야 허는 거유. 그게 참 옛날 야기지 뭐.” 말 그대로 너나없이 어려워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 이야기다.

배마루에는 고작 네 집이 사는데, 모두들 한 집안처럼 지낸다. 외지인을 빼고 다 모여 봐야 달랑 다섯 명. 한방을 꽉 채우지도 못한다. 그래서 겨울이면 이 곳 사람들은 이 집 저 집 마실 다니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랜다. 과거 배마루에 사람이 많이 살 때는 음력 칠월과 정월 보름에 풍물을 놀며 각기리 본동까지 원정도 갔지만,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제 아무도 꽹과리며 징을 치지 않는다. 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칠 사람이 없다.

■가는 길-승용차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 매포 인터체인지로 나가 적성 쪽 도로로 우회전하여 가다 보면 각기리에 닿는다. 각기리에서 금수산 쪽으로 비포장 도로를 따라 4km 남짓 올라가면 배마루가 나온다. 숙박 시설은 매포나 단양에 나가면 얼마든지 있다.
견불동(見佛洞). 부처를 보다, 불성(佛性)을 깨닫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마을. 법화산(法華山) 자락에 깃든 마을로,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두메 마을이다. 마을에 이르러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없이 많은 바위들. 그 바위투성이 산비탈에 위태롭게 집들이 들어서 있다. 어찌 보면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를 닮았다. 마치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불두(佛頭)처럼 박혀서 건너편의 지리산을 지긋이 내다보는 것만 같다.

실제로 견불동에는 오랜 옛날 견불사(見佛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만난 황기윤씨(40)에 따르면, 신라 때 지은 견불사가 사라지게 된 것은 산사태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짐작컨대 마을이 온통 바위투성이가 된 것도 당시의 산사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견불동에서는 논농사를 거의 짓지 않는다. 고작해야 고추나 채소 농사, 그것도 먹거리 정도만 짓고 있을 뿐이다. 불밭으로 일구었다는 이 곳의 논은 정말 다양한 모양을 선보이고 있다. 논 한가운데 바위가 여러 채 있는가 하면, 어떤 논은 거짓말 조금 보태 정말 손바닥만 하다.

견불동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재래 화장실인 똥돼짓간. 이 곳에는 옛 돼지막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돼지막은 위쪽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일을 보는 원두막 같은 화장실이 있고, 아래쪽에는 ‘똥돼지’를 가두어 키우는 막이 있는 형태이다. 화장실 바닥에는 통나무나 송판 가로대가 놓여 있는데, 막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아 일을 보며 돼지를 유심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돼지가 위를 올려다보다 튀어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어 특히 남자는 조심해야 한단다. 먹음직스런 용변을 향해 튀어올랐다가 엉뚱한 것을 무는 수도 있다고 하니….

간혹 용변이 묽을 경우 돼지 등짝이나 머리에 달라붙는 경우도 있는데, 이 때도 몸조심을 해야 한다. 녀석이 타다닥, 온몸을 심하게 요동치며 그것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십중팔구 일 보던 사람이 녀석이 튀겨 낸 묽은 용변 세례를 당하기 십상이므로.

또 이 원두막 같은 화장실은 워낙 지붕이 낮아서 키 큰 사람이 생각없이 일어났다가는 머리를 찧기 일쑤다. 그러니 일을 보고 일어나서도 대충 옷섶을 바지에 집어 넣고 나와 밖에서 다시 한번 옷을 챙겨 입어야 한다. 과거 이 돼지막에는 종종 돼지를 노리는 호랑이도 출몰했다고 한다. 실제로 나재수씨의 조부가 돼지막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았다는 얘기는 이 곳에서 유명한 일화로 전해져 온다.

쭦가는 길-견불동에 가려면 남원과 함양을 잇는 24번 국도 동면에서 마천 쪽으로 접어든다. 마천에서는 다시 유림 쪽으로 난 1084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가 문정리 고정에서 산 쪽으로 뻗은 시멘트 길을 오른다. 2km쯤 급한 오르막을 오르면 눈앞에 바위투성이 마을이 펼쳐지는데, 그 곳이 바로 견불동이다.
1948년 여순사건 이후 이른바 ‘빨치산’의 정착 투쟁지였던 지리산. 우리가 찾아간 문수리는 바로 지리산을 오르는 빨치산의 출입 통로가 되었던 곳이다. 문수 저수지로부터 시작되는 문수리는 30리에 이르는 기나긴 덕은내 계곡을 끼고 있다. 자연 부락으로는 밤재·불당·중대·웃대내가 있다.

문수리의 첫 번째 마을인 웃대내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다랑논이 아름답게 펼쳐진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가 중대마을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초가집과 샛집이 남아 있다. 조광래씨(67)네 집이 바로 그 집인데, 본채는 초가이고 ‘까대기’(행랑채)는 샛집으로 되어 있다. 초가와 샛집은 겉보기에 별로 차이가 없으나, 보통 샛집에 얹는 억새풀이 처마 밑으로 더 길게 내려와 있다. 또한 샛집의 지붕이 좀 성기게 보이는 반면, 초가지붕은 더 차분하고 깨끔해 보인다.

중대마을에서 산속으로 십리쯤 더 들어가 만나는 밤재마을에서는 잘 보존된 귀틀집을 한 채 만날 수 있다. 바로 남순임 할아버지(91) 댁이다. 나무 굴뚝도 옛날 그대로이고, 부엌에는 연기를 내보내려고 뚫은 까치구멍이 있으며, 가마솥 위쪽 벽에는 조왕신을 모시는 ‘조왕중발’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조왕중발 위에는 몇해 전까지 정성스럽게 정화수를 떠서 올려 놓았다. 남노인이 손수 지었다는 이 귀틀집은, 살림채와 사랑채가 서로 맞보고 있는 형태다. 몇 년 전 귀틀집 안주인인 이남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순임 할아버지가 외롭게 이 집을 지키고 있다.

■가는 길-승용차로 갈 경우 구례-하동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토지면 오미리 쪽으로 좌회전해, 문수사 팻말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문수 저수지를 지나 첫 번째로 보이는 왼쪽 마을이 웃대내, 조금 더 가서 만나는 오른쪽 마을이 중대마을이다. 문수분교를 지나 계속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 불당마을이 있고, 다시 더 올라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쪽은 문수사 가는 길이고, 왼쪽은 밤재로 가는 길이다. 마을에 민박집이 여럿 있으므로 숙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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