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 잘 이용하면 종합병원 안 부럽다
  • 오윤현 기자 (noma@sisapress.com)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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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장비 갖추고 각종 질병 진료… 비용은 절반 이하
98년 2월 IMF 체제가 시작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공정거래위원회에 뜻밖의 제소가 접수되었다. 보건소가 환자를 진료하는 행위를 서울시의사회(의사회)가 공정 거래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보건소가 낮은 가격으로 주위 의원과 거의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해, 공정 거래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것이 의사회 주장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신중히 검토한 끝에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지역 보건소의 의료 행위는 공공 행정 분야로서, 공정거래법 제2조 사업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아니하여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상황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그 제소가 남긴 의미는 남달랐다. 개인 의원들이 보건소를 경쟁 상대로 보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보건소의 의료 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뜻하기도 했다.


암 진단·간 기능 검사는 기본

보건소는 그 뒤로도 질과 양에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주부 김 아무개씨(30·서울 양천구 목동)는 얼마 전까지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예방 접종이나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진료하던 곳이 달라졌으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김씨의 고정 관념은 180° 바뀌었다. 아이의 예방 접종을 위해 양천보건소에 갔는데, 시설이나 서비스가 기대 이상이었다. 김씨는 “내부는 깨끗했고, 시설은 종합병원 수준에 가까웠다”라고 말했다.

예전의 김씨처럼, 아직도 보건소 하면 변변치 않은 의료기관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전국의 2백43개(1999년 말 현재) 보건소는 여러 모로 달라졌다. 특히 서울시에 있는 보건소의 경우, 의료 서비스 내용이 주위에 있는 일반 병원과 별 차이가 없다.

서울 성동보건소는 지난해 1억원 상당의 컴퓨터 운동 기구인 메덱스를 갖추어 놓고, 요통 및 디스크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생화학 자동 분석기로 간기능 검사와 C형 간염 검사 등을 하고 있다. 또 만성 성인병을 진료하고, 갱년기 여성을 대상으로 보건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노인을 위한 안(眼) 검진, 의치 무료 사업, 치매 신고센터 운영도 중요 사업들이다.
국내 보건소 가운데 가장 먼저 문을 연 성동보건소 ‘건강의 전화’는 주민들에게 건강 상담을 해주고 있다. 02-2298-2300번으로 전화하면 상담원이 상담자의 지병(持病)이나, 생소한 질병, 응급 처치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하루 40여명이 이용하는 건강증진센터에서는 에어로 바이크 같은 기기로 심폐의 지구력·유연성 등을 측정해, 그 사람에게 맞는 운동량을 처방하고 있다. 또 룸바익스텐션 같은 기구를 이용해, 요통 환자의 재활을 돕고 있기도 하다.

시설은 일반 병원과 비슷하지만, 비용은 일반 병원의 4분의 1 정도로 싸다. 건강증진센터와 비슷한 시설을 갖춘 일반 병원을 이용할 경우, 한 달에 10만∼30만 원 정도가 든다. 하지만 보건소 건강증진센터는 1회당 1천1백원만 내면 된다. 간염 예방 접종비( 5천원. 30kg 이하 어린이는 1천9백원)와 장티푸스 예방 접종비(3천7백50원)도 일반 병원의 2분의 1∼3분의 1 수준이다. 어린이 발치(1천1백원)와, 치아 홈을 메우는 실란트(개당 3천3백원)도 마찬가지이다.

예방접종비와 치료비가 싸다고 해서 약의 품질이 나쁘거나 의료 기술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강의전화 상담원 홍미해씨는 자신도 보건소 근무를 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몇년 근무해 보니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일해, 오히려 좋은 약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 구로보건소는 국내 보건소로는 처음으로 면역형광자동분석기로 ‘암 표지자 검사’를 실시해, 주민들의 간암·대장암·폐암·유방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있다. 구로보건소 건강증진센터 김계하 팀장은 구로구 주민과 구로구에 있는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처방을 받을 수 있다”라고 밝혔다.

서울 강서보건소는 간접파 치료기·적외선 치료기·간기능 검사기·골밀도 측정기 등 89종에 이르는 첨단 의료 장비를 갖추고 있다. 지난 6월에는 1억5천여만원을 들여 원스톱 진료 공간을 만들고, 실내를 최고급으로 꾸몄다. 또 강서정보건강센터 기능을 확대해 5백여 명의 정신질환자를 관리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뇌졸중이나 교통 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를 위한 재활 체조 교실도 문을 열었다.
강북보건소는 비만 대상자를 상대로 걷기·조깅 같은 살빼기 운동을 지도하고 있고, 양천보건소는 관절염 수중운동 교실을 열어 관절염 환자의 완치를 돕고 있다. 또 영등포·도봉 보건소는 골다공증 검사를 하고 있고, 광진보건소는 갑상선과 위암 검사를 하고 있다. 동대문보건소와 강동보건소는 각각 기형아 검사와 백내장 무료 시술(저소득층 대상)을 하고 있다. 서초보건소는 골절을 당했을 때 쓰는 ‘재활 기구 나눔은행’을 개설해, 목발·휠체어 등을 빌려주고 있다. 몇몇 보건소는 대학병원과 손잡고 저소득층과 장애인을 상대로 관절염 및 척추 질환 같은 정형 외과 진료를 무료로 하고 있다.

지방의 보건소들도 시설을 늘리고, 서비스 질을 높이고 있다. 강원도 양구보건소는 2,3년 전부터 물리치료실·체력증진실·임상병리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 생화학분석기를 갖추어놓고 싼값에 주민들의 간기능·당뇨병·혈액 검사를 해주고 있다.

과거에 양구에 사는 암 환자들은 혈액 검사만 받으려고 해도 2시간 거리에 있는 춘천에 가야 했다. 하지만 보건소가 생화학분석기를 들여놓고 난 뒤, 그같은 번거로움은 사라졌다. 간호사 오민자씨는 “보건소가 군내 의료기관 가운데 가장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밖에도 수도권과 전국의 보건소 대부분이 첨단 장비를 갖추어 놓고 주민들을 돌보고 있다. 지난해 말 수도권 25개 도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거주지 보건소의 의료 서비스 만족도를 조사했을 때, 대부분의 주민이 만족감을 나타낸 것은, 보건소의 이같은 ‘발전’ 덕이었다.

그러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의약품과 의료진 부족을 가장 불만족스러운 점으로 꼽았다. 실제 지난 10월 중순 서울시내 보건소 5곳에서 독감 백신이 바닥 나 주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산간·도서 지방 보건진료소의 시설 낙후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제주도의 한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하는 오 아무개 공중보건의는 “내과 의료 장비라고는 청진기밖에 없다”라며, 하루빨리 의료 시설의 지역 편차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 의료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같은 지역 편차를 줄이고, 보건소의 시설과 서비스를 좀더 선진화하려면 보건복지부 예산의 2.4% (1999년)인 보건 의료 분야 예산을 좀더 늘려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이 좀더 자주 이용하면서, 불편 사항을 그때그때 지적해서 고쳐 가야 한다. 결국 시설이 뛰어나고 안락한 보건소를 만드는 일은 주민 손에 달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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