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논술’도 치열했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r)
  • 승인 200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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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임금께서 먼저 정신 차려야 합니다.” 과거 시험 급제자가 ‘폭군’ 광해군에게 올린 과감한 답안이다.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선비 정신이 살아 있었다고나 할까.우리에게도 논술 시험의 시퍼런 전통
수능 한파가 지난 자리에 논술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논술 교실에서는 칸트와 헤겔에서 들뢰즈까지, 알 듯 모를 듯한 서양 철학자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족집게 구술 강사는 이라크 파병과 위도 핵폐기장 문제의 정답을 찍어준다. 온고지신과 타산지석의 교훈을 통해 인스턴트 교육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 시대 과거 시험과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을 살펴보았다.

“어리석은 저는 거리낌 없이 모두 지적하여 아뢰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관대함을 베푸셔서 훌륭하고 밝은 세상에 직언했다고 화를 입는 자가 없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국가를 위한 복입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정신 못 차리는 임금’이 가장 화급한 문제이옵니다.”

광해군 3년(1611년), 별시 문과에 병과 급제(최하위 그룹으로 합격)한 임숙영의 답안 내용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강으로 급히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과감하게도 왕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답했다. 광해군은 그를 낙방시키라고 명했으나 시험관이었던 심희수가 목숨을 걸고 합격을 주장해 말석으로 합격했다. 어렵게 합격한 임숙영은 결국 인조 반정에 참가하여 광해군의 폭정을 종식하는 데 일조했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시와 부를 짓는 진사시와 사서오경의 소양을 묻는 생원시로 나뉘었고, 대과는 문과와 무과로 나뉘었다. 가장 중요한 시험인 문과 시험은 초시(1차 시험)·복시(2차 시험)·전시(3차 시험)로 나뉘어 치러졌다. 일종의 학력 시험인 진사시와 생원시는 스무살 안팎에 보는 것이 보통이었고, 입사 시험 격인 문과는 대부분 20대 중후반에 치렀다.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는 주로 국가 현안에 대한 대책을 논하는 시험이 치러졌는데, 당시에 가장 시급한 사회적 현안이 문제로 출제되었다. 중종 8년(1513년), 별시 문과에서는 흉년을 당하여 금주령을 내려도 민간에서 술을 빚는 일이 끊이지 않자 이를 막기 위한 방책을 묻기도 했다. 이 시험에서 김 구는 생기기 쉬운 화를 물화로, 구제하기 어려운 화를 심화로 구분한 다음 심화가 먼저 있고 물화가 뒤따른다며 심화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해 을과 급제(2위 그룹으로 합격)했다.

문과 시험의 전시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국가적으로는 이상 사회를 이루는 공부인 성학(聖學)을 바탕으로 한 문과 시험을 통해 통치 철학을 구축했고,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켰다.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합격자는 ‘사가독서’(공부를 더 할 수 있도록 정무에서 제외해 주는 것)를 허락함으로써 주자 성리학이 독자적인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할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문과 시험 급제 답안을 모아 놓은 <조선 과거 실록>(지두환 역)을 보면, 시험 문제의 경향에 뚜렷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조 창업기인 15세기에는 주로 주자 성리학에 입각한 통치 이데올로기를 물었고, 조선 성리학이 정립된 16세기에는 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를 물었으며, 문화적 융성기인 17세기에는 통치 철학을 적절히 구현할 방안을 물었다.
성리학이라는 외래 사상을 수용해 통치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던 15세기에는 주자 성리학에 입각한 이상 사회 구현 방안이 주로 문제로 출제되었다.

15세기의 문과 시험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험(세종 29년 중시. 1447년)을 보았던 성삼문(장원 급제)과 신숙주(을과 급제)의 상이한 답안 내용이다. 이들의 답안을 비교해보면 이후의 정치 행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법안 제정의 폐단에 대해서 논하라는 물음에 훗날 사육신이 된 성삼문은 제도 개혁보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세조의 반정에 참가한 신숙주는 인재 등용이 더 중요하다며 출세지향적인 가치관을 드러냈다.

조선성리학이 확립되던 16세기는 율곡 이 이의 독무대였다. 모든 시험을 장원으로 합격해 ‘국가 장원’으로 꼽혔던 이 이는 명종 19년(1564년) 식년 문과에서 조선 왕조 5백년에서 최고 답안으로 꼽히는 ‘천도책’(하늘의 변화는 어떠한 이치에 따르는가)을 작성했다. 이기일원론을 통해 주자 성리학 모방이 아닌 독자적인 조선 성리학을 구축한 이이는 이미 과거 시험 답안을 통해서 자신의 완성된 철학 체계를 선보였다.

이 이에 의해 완성된 조선 성리학은 17세기에 이르러 꽃피우게 된다. 답안도 최고 수준에 달한다. 그러나 당쟁으로 사회의 기틀이 흔들리면서 18세기에는 답안이 현학적인 미사여구 위주로 흘렀다. 세도 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한 19세기에 이르면 과거 시험은 부정부패로 오염되어 시험 기능을 거의 잃게 된다.

<조선 과거 실록> 저자 지두한 교수(국민대·국사학과)는 논술 시험 최고 교재가 과거 시험 답안지라고 말한다. 그는 “논술 시험을 준비하면서 서양 철학책만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도 훌륭한 논술 시험의 전통이 있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과제를 타개하려 했던 급제자들의 고민을 들여다본다면 오늘의 과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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