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원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황장엽 한국행, 미국이 적극 도와야 한다”
  • 워싱턴/변창섭 (cspyonsisapress.comr)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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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권력 암투는 지금까지 주체사상 해석과 경제난 해결책을 놓고 강온파가 대립하는 양상을 띠어 왔는데 이번 망명 사건으로 온건파가 숙청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즉, 군부내 강경파와 친김정일 신진 세
냉전 후 사회주의권 국가가 퇴조하는데도 엄격한 주민 통제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져온 북한이 현재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있다. 바로 그 사상적 기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이자 최고인민회의의장(우리의 국회의장)을 세 번이나 지낸 황장엽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74)가 2월12일 북경 주재 한국 공관에 망명을 신청했기 때문이다. 망명의 성사 여부가 중국의 태도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급박히 전개되고 있는 이번 사태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국제 정치에 밝은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김정원 박사는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국 또는 국제기구(예를 들면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가 적극적인 지원을 펼쳐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김박사는 국제정치학으로 미국 내에서도 첫손가락 꼽히는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SAIS)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뒤 국무부와 국방대학원, 컬럼비아 대학·하버드 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했다. <편집자>

황장엽 비서의 망명 사건을 둘러싸고 그 성패의 열쇠를 쥔 중국이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리라 봅니까?

92년 중국이 한국과 수교한 뒤 중국과 북한 간에는 알력도 있었지만 두 나라는 기본적으로 40년 넘게 혈맹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중 수교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는 북한을 지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한국을 중시하는 등거리 외교를 펼쳐오긴 했지만 말입니다. 현재 북한은 황의 망명을‘납치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한국은 자의에 따른 망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중국은 미묘한 삼각 관계에 빠져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은 난민 문제에 관한 한 국제 사회의 비난이 있더라도 북한의 뜻을 따랐으나, 한국행을 원하는 북한 귀순자의 경우 홍콩에 인도한 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중국은 앞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며 공식 입장을 유보한 채 국제 여론을 보아 가며 결정을 내릴 것 같습니다.

남북한이 현재 황의 망명 사건을 둘러싸고 중국에서 총력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중국이 호락호락 황의 한국행을 허락할 것 같지 않은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사실 중국에 대한 외교만을 살펴볼 때 우리는 북한에 비해 열세입니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사건 초기에 이례적으로 빨리 황이 망명한 사실을 국제 사회에 공개한 것도 ‘중국의 자체적인 판단’에 의지하기보다 국제 여론의 힘을 빌려 보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고위급 대표단을 중국에 보내 황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어 우리의 외교 노력에 난관이 예상됩니다. 우리는 ‘국제 관례 존중’과‘인도주의적 배려’ 원칙을 국제 사회에 널리 강조하면서 끈기 있고 세련된 외교 설득전을 펼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번에 일을 그르칠 경우 중국과의 관계는 앞으로 상당 기간 경색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황씨 망명 사건을 다루는 데 사건 초기에 미숙함을 보였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데요.

우리 정부 대변인이 황이 망명한 당일 공식 회견을 연 것은 나름의 충분한 숙고와 판단 끝에 나왔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 배경 중에는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국제 여론을 환기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또 북한이 비밀 루트를 통해 황의 망명을 파악해 조처를 취할 수도 있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해 서둘러 그의 망명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도 싶었을 겁니다.

중국이 남북한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결과적으로 망명 사건이 장기화할 때 미국이 취해야 할 역할은 없을까요?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평화를 위해 미국은 국제법 또는 국제 관례에 따라 직·간접으로 이번 사건을 원만히 해결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황비서가 북한 체제에 관한 내용을 낱낱이 실토하고, 북한의 군사력, 핵무기 개발 진상, 대남 정책, 나아가 한국에 침투해 있다는 간첩에 관해 상세한 정보를 제공할 경우 미국의 대북 정책 당국자들에게 결정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최첨단 군사 위성을 이용해 북한에 관한 정보를 캐낸다 하더라도 황의 생생한 증언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특히 북한이 어느 나라보다 폐쇄된 사회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황은 최고의 정보원이 될 것입니다. 그가 제공하게 될 고급 정보와 정세 판단은 미국이 북한 정책을 세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 분명하므로 미국은 국제 관행을 내세워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그의 한국 망명을 지지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4자 회담, 핵문제, 미사일 협상, 미군 유해 발굴 등 북한과 여러 현안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황씨의 신병 인도 문제를 주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이 아닌 제3국으로 망명을 허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럴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중국 정부의 복잡한 의사 결정 구조를 감안할 때 시간이 걸리겠지요. 현재 중국이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대해 냉철하고 차분한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한국도 인내력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외교 전술을 구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3국행이 확실해질 경우 그의 생명과 안전에 지장이 없도록 최대한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북한이 그의 한국행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망명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북한 권력층이 황씨처럼 대외파·온건파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벌일 가능성도 있겠지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망명 사건을 징계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해당 인사와 연루된 사람들을 철저하게 보복하고 숙청하는 것입니다. 일단 황씨의 경우 그 가족은 물론 친인척과 측근이 모두 숙청될 것이 분명합니다. 북한의 권력 암투는 지금까지 주체사상 해석과 경제난 해결책을 놓고 강온파가 대립하는 양상을 띠어 왔는데, 이번 망명 사건으로 온건파가 대거 숙청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즉, 군부내 강경파와 친김정일 신진 실세들이 결집해 결과적으로 온건파와 개방파의 입지가 크게 줄 것입니다.

북한이 황씨의 망명 사건을 트집잡아 한국에 대해 무모하게 도발할 가능성은 없을까요?

사실 북한은 지난해 9월 잠수함 사건 이후 체면이 많이 깎인 상황에서 이번에 황씨 망명 사건까지 겪게 됐습니다. 따라서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크고 작은 형태의 복수극을 펼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씨에 따르면 한국 권력층 내부에 고정 간첩이 상당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국가 안보의 핵심에 구멍이 뚫인 셈입니다. 사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얘기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북한이 핵무기 5개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권력 핵심부에 고정 간첩이 포진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한국내 간첩 5만명 존재설’은 우리 안보 문제와 직결된 사안인 만큼 우리 정부가 발언의 진위를 가려 내부 조사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주체 철학의 창시자인 황이 망명함으로써 북한 정권의 통치 철학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북한의 조기 붕괴 가능성이 또다시 거론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설계자이자 핵심 브레인인 황의 망명은 북한 지도부에 핵폭탄 같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많은 서방국이 황씨의 망명이 북한의 붕괴를 상징한다고 보지만, 정작 황씨는 북한이 빠른 시일 안에 무너질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증언대로 북한 사회는 봉건 사회입니다. 즉 북한 정권에 의해 고도로 세뇌되고 체계화한 주민들이 정권에 항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또 세상의 물정을 잘 알 만한 엘리트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섣부른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식량과 연료, 군대와 무기가 있는 한 북한은 한국을 적화 통일하려는 꿈을 버리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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