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아·주세혁의 신들린 수비 탁구
  • 김경호 (굿데이 기자) ()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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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주세혁 선수, 수비 전형 탁구의 진수 보여주며 ‘승승장구’
“수비 전형 선수가 어떻게 저럴수가….” 한국 여자 탁구의 간판 김경아(대한항공·세계 6위)에게 쏟아진 탄성이다. 세계 탁구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수비 전형’인 김경아는 지난 3월3일(한국 시각) 카타르 도하에서 벌어진 2004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챔피언그룹 A조 예선 마지막 경기인 중국전에서 한국의 에이스로 나서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개인 단식 챔피언인 ‘탁구 여왕’ 왕난(중국·세계 2위)을 3-2로 격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중국에 져 조2위로 밀린 뒤 결국 동메달에 그쳤지만, 김경아가 보여준 수비 전형의 진수는 세계 탁구인들을 놀라게 했다. 김경아는 이번 대회에서 아홉 경기에 나서 8승1패를 거두어 세계 랭킹이 한 계단 상승했다.

김경아의 약진은 그가 수비 전형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탁구계에는 ‘수비 전형은 결국 공격수를 이겨내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어 왔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여자 탁구의 간판은 수많은 공격 전형 선수들을 제친 김경아이다. 앞서 맹위를 떨쳤던 유지혜(전 삼성카드)가 은퇴하고, 김무교(대한항공)가주춤한 탓도 있지만 수비 전형으로 세계 랭킹 6위에까지 오른 전례는 없었기 때문에 김경아의 성장은 높게 평가된다.

‘수비 전형의 반란’은 2003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지난해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주세혁(상무)은 수비 전형으로 강호들을 잇달아 격파하고 준우승을 차지해 ‘수비 혁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일약 국제 무대의 샛별로 떠올랐다.

‘마치 신이 탁구를 하는 것 같았다’는 것이 그에게 쏟아진 찬사였다. 당시 세계 랭킹 61위로 국제 무대에서는 무명이었던 주세혁은 16강전에서 세계 랭킹 5위인 첸치유안(타이완)을, 8강전에서는 세계 2위 마린(중국)을 눌러 파란을 일으켰고, 준결승전에서도 세계 9위 칼리니코스 크리엥가(그리스)를 제쳐 1950년 이후 53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수비 전형이 결승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 남자 탁구가 세계선수권대회 단식 결승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비록 주세혁은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6위인 베르너 쉴라거(오스트리아)에게 져 준우승에 그쳤지만, 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중은 주세혁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주세혁은 이 쾌거로 세계 랭킹이 39계단을 뛰어올라 22위까지 치솟았고, 이후에도 꾸준히 상승세를 타 현재는 세계 랭킹 15위이다.

한국 탁구에서 수비 전형은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수비 전형은 그저 팀 내에서 단체전을 위한 조커나 공격 전형들의 훈련을 상대하기 위한 용도로 양성되었다. 실제로 수비 전형 선수들은 국내 대회에서조차 우승을 차지한 사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약세였다.

그러나 2001년 9월 국제탁구연맹(ITTF)이 11점제를 도입하면서 수비 전형이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과거 21점 3세트제에서는 수비 전형이 좀처럼 공격수를 이길 수 없었지만 11점 5세트, 7세트제가 도입되면서 사소한 실책이나 초반 컨디션 등이 경기 흐름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때부터 안정된 수비로 범실이 적은 수비 전형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수비 전형의 반란에 앞장선 대표선수가 김경아였다. 당시 세계 랭킹이 53위에 불과했던 김경아는, 11점제가 적용된 두 번째 국제 대회인 일본오픈에서 같은 수비 전형인 김복래(한국마사회)와 짝을 이루어 세계 랭킹 10위권 내의 선수들로 짜인 왕난-타마라 보로스(크로아티아)조를 물리치고 정상에 올라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김경아-김복래 짝은 다음 달 독일오픈도 석권해, 2관왕에 오르며 국제 무대에서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김경아는 이듬해 열린 일본오픈에서 세계 10위인 미하엘라 슈테프(루마니아)를 물리치고 생애 첫 국제 대회 우승을 따내며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할 발판을 만들었다. 여기에 200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주세혁이 이룩한 쾌거는 ‘수비수 반란’을 ‘혁명’으로 승화시킨 결정타였다.

단순히 11점제가 도입되면서 수비 전형이 빛을 보았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수비 전형 가운데서도 특히 주세혁과 김경아는 공격력이 뛰어나다. 수비에만 치중하면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주세혁과 김경아는 공수의 비율을 5 대 5 또는 4 대 6 정도로 안배한 경기를 한다. 일단 상대의 맹공을 받아 넘기는 척하다가 상대가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곧바로 공격으로 전환해, 공격 전형보다도 더 매서운 파워를 발휘한다. 그만큼 순발력이 뛰어나다.  

수비 전형은 라켓 뒷면에 이질 러버를 붙인다. 솔이 가늘고 긴 이질 러버에 맞은 공은 상대의 드라이브 회전에 역회전을 걸어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공격 전형이 쩔쩔맨다. 여기에 가미되는 매서운 공격. 공격 전형 선수들은 언제 반격이 올지 몰라 강공 일변도로 나설 수밖에 없고 이때 발생하는 범실도 수비 전형이 얻는 부가 이득이다.

이같은 추세에 맞추어 중고등학교 무대에서도 수비 전형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부천 중앙고 여인호, 부천 내동중 이강석, 인천여상 최문영, 서울여상 서명은이 수비 전형 가운데 차세대 간판으로 꼽힌다.

각국마다 희귀했던 수비 전형을 적극 양성할 정도로 수비 전형은 이제 국제 탁구계에서 새로운 파워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그 선봉에는 한국의 김경아와 주세혁이 있다.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아테네올림픽에서 이들이 거두게 될 성적은 ‘수비 혁명’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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